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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마다 계곡마다 낙엽이 수북히 쌓이는 11월. 새파란 하늘에 그려진 헐벗은 나뭇가지에 마지막 남은 잎새가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다. 한 잎... 또 한 잎... 떨어지는 낙엽을 세고 있는 병 든 소녀.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미국 작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그 소녀가 바라보았던 마지막 잎새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저 마지막 잎새는 어느 순간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떨어져서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 것이다. 그래, 이러한 11월에는 지글지글 끓는 그런 온돌방이 아니라도 좋다. 연탄보일러로 데워진 방일지라도 그 방에 드러누워 책 속으로 길고 긴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마지막 잎새를 잃은 그 허전함을 이기는 지혜일 것이다.

▲ <포구기행> 표지
작고 하찮은 포구들의 불빛, 곽재구의 <포구기행>

단풍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 톱밥의 불꽃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몇 토막)


시인이 포구에 가서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래 생각하며 무엇을 주워왔을까. 요즈음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강의하고 있는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열림원, 9500원)이 나왔다. 이번에 펴낸 <포구기행>은 곽재구 시인의 두 번째 기행산문집.

하지만 시인이 처음 펴낸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과는 그 내용이 사뭇 다르다. 1993년에 펴낸 <내가...>는 시인이 예술가들의 흔적과 발자취를 따라간 일종의 문인 탐방기이다.

하지만 이번에 펴낸 <포구기행>은 우리나라 안의 작은 포구 마을, 하찮아보이고 보잘 것 없을 것 같은 그런 포구에서 따개비처럼 살아가는 어민들의 꿈과 한을 시적인 문체로 잔잔하게 더듬고 있는 기행문집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 반도 곳곳에 포구가 없는 곳은 없다. 어떤 곳은 그 포구가 자라서 큰 항구가 되어 부두까지 끼고 살지만, 우리나라 곳곳의 갯마을에 흩어져 있는 대부분의 포구는 항구가 아니다. 그저 작은 통통배 몇 척과 나룻배 열서너 척이 만선의 꿈을 나부끼면서 매여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본다. 지금도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낡고 일부가 찢겨져나간 그 깃발 속에 숨겨진 어부들의 소박한 마음을. 그리고 지지리도 못났지만 멍게처럼 꽉찬 어부들의 그 꿈을...

죽은 불가사리처럼 모든 꿈이 사라진 것만 같은 한적한 바닷가의 그 포구. 방게처럼 작고 해파리처럼 하찮아 보이는 그 포구에서 시인은 잃어버린 시간의 껍데기를 줍기도 하고, 갈매기처럼 끼룩대며 어부들의 소박한 꿈을 들추어낸다.

이 책은 '섬에서 보낸 엽서'로 시작되어 '바다와의 만남'으로 끝난다. 제1부는 '겨울꽃 지고 봄꽃 찬란히 피어라-화진 가는 길' '소라고둥 곁에서 시를 쓰다-선유도 기행' '진도 인지리에서 남동리 포구로 가는 길' 등이, 제2부는 '순천만에서' '전북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 등이, 제3부는 '남제주군 대정읍 사계포' '우도로 가는 길' 등이 작은 어선에 줄줄이 매달린 집어등처럼 불빛을 깜빡거리고 있다.

파도의 축제가 눈부신 화진, 멸치털이와 멸치구이의 맛이 환상적이었던 정자항, 선유도, 동화와 지세포, 어청도, 삼천포, 구만리, 인지리, 남동리, 순천만, 화포, 거차, 향일암, 회진, 왕포, 구시포, 사계포, 우도, 조천, 지심도, 춘장대, 장항, 상족포구, 어란포구...

"문득 깜깜한 바다 한가운데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빛 하나가 보입니다... 작은 배 위에 한 노인이 등불을 들고 서 있습니다. 그가 내게 삿대를 내밉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배 위에 오릅니다. 세월이 가고 다시 세월이 오고, 그 속에서 밥을 먹고 시를 쓰고 파도소리를 듣고, 그러다가 그 길목 어디에서 우연히 시의 신을 만나 함께 배 위에 오를 수 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요."

김삿갓 뺨치는 방랑시인 이용한의 <이색마을 이색기행>

▲ <이색마을 이색기행> 표지
이색적이다?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국어사전을 들추어보면 이색적이란 말의 풀이는 '색다르게 두드러진 성질'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색다르며 무엇이 두드러졌다는 말인가.

이색적이란 이 단어 속에는 반드시 비교가 될 만한 그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 이용한이 바라본 이색적인 마을은 대체 어떠한 마을이며, 어떻게 색다른 기행을 했는지에 대해서 책을 한번 펼쳐보자.

이 책은 우리나라를 모두 3부로 쪼갠 뒤 35개 마을을 24가지 주제별로 엮었다.

제1부는 강원도 기행기로 '한반도 절벽마을' '섶다리 마을' '협곡마을' 등이 실려 있고 제2부는 전라도 기행기로 '띠뱃놀이 마을' '솟대당산 마을' '구들장논 마을' 등이, 제3부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아울러 '모래마을' '원시어업 마을' '물돌이 전통마을' 등이 수레에 실린 짐짝처럼 묵직하게 실려 있다.

<이색마을 이색기행>(실천문학사, 1만5천원)은 제목 그대로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글쓴이가 이색마을이라 생각하고 있는 마을은 그 마을의 풍물과 문화가 이색적인 곳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띠뱃놀이 마을을 비롯한 솟대당산 마을, 남근석 마을, 서당마을, 초가마을 초분마을 등이 그것들이다. 또 이색기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을의 지형과 환경이 독특하고 이색적이라는 것이다. 지형과 환경에 따라 이름을 붙힌 한반도 절별마을, 협곡마을, 모래마을, 뭍섬마을, 물돌이 전통마을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섶다리 마을을 비롯한 굴뚝 고가촌, 고인돌 마을, 영화마을, 석성마을, 구들장논 마을, 원시어업마을, 다랑논 마을, 암각화 마을 등은 우리네 조상들의 독특한 삶의 형태와 문화유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이름 또한 이색적이다. 하지만 언뜻 들어보아도 마을 이름이 예로부터 그렇게 불리워졌던 그런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 짜집기한 그런 흔적이 묻어 있다는 점이다. 하긴 그래서 말 그대로 이색적인 마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21세기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리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이용한 시인의 <이색마을 이색기행>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런 마을, 그리고 그 마을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풍습과 문화, 독특한 지형을 가진 감추어진 우리나라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여행기와 차별된다.

하지만 전혀 이색적이지 않은 마을도 더러 있다.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이색적으로 만든 곳도 있고, 가만히 그대로 보아도 그야말로 이색적인 곳을 전혀 이색적이지 않게 만든 곳도 더러 눈에 띈다는 그 말이다.

안홍범이 찍은 250여 컷의 생생한 사진도 <이색마을 이색기행>을 더욱 이색적인 풍경으로 만들어준다. 책 곳곳에 얌전히 박힌 사진에서는 금방이라도 산토끼 한 마리가 맑은 눈망울을 굴리며 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

김삿갓 뺨치는 21세기 방랑시인 이용한은 1995년 <실천문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와, 우리나라 각 지역의 풍물과 민속, 토종문화와 지역문화의 흔적들을 더듬는 일을 즐기고 있다.

▲ <우리 숲 산책> 표지
나무와 꽃과 풀들의 합창, 차윤정의 <우리 숲 산책>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 ('풀' 몇 토막)


산림학자 차윤정 박사가 펴낸 <우리 숲 산책>(웅진닷컴, 1만원)에서는 온통 나무와 꽃과 풀들의 합창소리가 가득하다. 이 책을 펼치면 일시에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숲이 내뿜는 맑은 공기가 있는가 하면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꽃내음과 풀내음이 물씬 묻어난다.

<우리 숲 산책>은 선운사 동백 숲에서부터 장백산 원시림까지 우리 나라 땅과 산 곳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숲과 나무, 꽃과 풀들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산불이 난 뒤 그 처참한 검은 잿더미 속에서도 기어이 움트고 올라오는 파아란 새싹들, 그 초록색 연한 새싹들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누구나 다시 한번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은 모두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마음을 두고 온 풍경'은 난대림에 속하는 완도의 갈문리 모감주나무군락, 지리산의 야생화, 가을 계방산의 단풍, 푸른 대숲이 아름다운 담양, 선운사 동백숲, 서해 변산 등 우리 나라 숲에 대한 이야기다.

제2장 '생명의 노래'는 산불이 난 다음 다시 싹이 돋아나는 고성, 산불로 억새밭이 생긴 유명산, 연안에 뿌리를 내린 서해 갈대숲, 주목과 구상나무가 어우러진 덕유산 등 생명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다. 제3장 '원시의 기운'은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신비와 야생화 초원 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누구나 산에 오른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이유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산에 살고 있는 나무와 풀과 꽃의 표정과 이야기다. 늘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듯한 나무와 풀들의 삶은 산을 오르는 이들의 사연만큼이나 제각기 다른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숲 산책>은 차윤정 박사가 임업협동조합중앙회에서 발간하는 <산림>지에 4년간 연재한 글을 새롭게 손질하여 펴낸 책이다.

그저 숲이 좋아, 나무가 좋아, 꽃이 좋아, 풀이 좋아서 배낭 하나 둘러매고 전국의 산천을 누비고 다녔다는 차윤정 박사. 숲처럼 나무처럼 꽃처럼 풀처럼 자연 그대로를 그토록 사랑하는 그에게 우리는 이제 또 하나의 수식어, '숲박사'라고 불러야 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산림학자 차윤정이 낸 책/<삼림욕, 숲으로의 여행> <신갈나무 투쟁기> <식물을 왜 바흐를 좋아할까> 등.

곽재구의 포구기행 - 꿈꾸는 삶의 풍경이 열리는 곳

곽재구 글, 해냄(2018)


차윤정의 우리 숲 산책

차윤정 글.사진, 웅진지식하우스(2002)


이색마을 이색기행 - 색다른 풍경과 풍물, 숨겨진 마을문화를 찾아서

이용한 글, 안홍범 사진, 실천문학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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