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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디부디 큰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이원수의 시 '지원병을 보내며' 중에서)

<조선일보>가 ''고향의 봄' 이원수 선생 항일활동 / 당시 조선일보 통해 뒤늦게 확인'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2일치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아동문학가 이원수도 사실은 알고 보면 적지 않은 친일시를 남긴 변절 문인이었다.

이원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파 99인>이나 최근에 발표된 친일파 708명의 명단에도 나오지 않는 문인이다.

<경남도민일보>는 4일치에서 경남대 박태일(시인) 교수가 연구해온 결과를 바탕으로 이원수가 42년 8월 <반도의 빛>이라는 월간잡지에 발표한 친일시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한글시를 공개했다.

이 시의 1연은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로 이뤄져 있는데 "정거장, 밀리는 사람 틈에서/ 손 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만세) 소리는 하늘에 찼네"로 2∙3연이 이어진다. 기사 첫머리에 인용한 것은 마지막 4연과 5연이다.

박태일 교수에 따르면 이원수의 친일시는 이밖에도 여러 편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수는 자신의 이런 과오를 의식한 탓인지 생전인 80년 11월 뿌리깊은 나무에서 펴낸 <털어놓고 하는 말2>에 쓴 글에서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다.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그런 시대였다. (...중략...)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에 나는 그 가야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요행히 노무 동원에 끌려가지 않고 그날을 맞이했던 것은 나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해방을 맞았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 분자의 하나로 남들에게 보였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디 살아 있을 수조차도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이원수가 36년 출옥 후 37년 함안의 금융조합에 복직하는 과정에서 일제와 타협했거나, 그 이후 태평양전쟁이 가열되면서 금융조합 직원도 보국대에 끌려가야 했던 상황에서 용케 끌려가지 않은 이면에 이런 친일시를 쓰게 된 사정이 있지 않았나 하고 짐작하고 있다.

이처럼 한때 항일혐의로 일제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이원수가 이후 변절하여 친일시를 썼다는 사실도 <조선일보>가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 대대적으로 키운 35년 '프로문학사건(일명 함안독서회 사건)'의 경우 <조선일보> 자사 지면에서도 이미 7년여 전에 보도했던 내용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조선일보 검색 결과 지난 95년 5월5일치 <조선일보>에는 권혁종 기자의 이름으로 '5월의 문화인물 이원수'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도 이미 "35년 반일 모임인 함안독서회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그는 현실의 어려움을 헤치며 꿈을 이루려 애쓰는 꿋 꿋한 어린이상을 그린 작품들에 평생을 쏟았다"며 그 사건을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조선일보>의 3월 2일치 기사가 하루 전날인 1일 지역일간지 <경남신문>에 역시 1면 사이드로 보도됐던 내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경남신문>도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을 마치 새로운 사실처럼 보도했으니 해프닝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이미 충분히 지적했지만, 그게 새로운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는 몇 가지 사례를 몇 가지만 더 들어보자.

우선 가장 가까운 기록으로는 지난 해 9월 3일치 <경남도민일보>에 김훤주 기자가 쓴 연재기획물 "아! 이원수' 7회분 '취업·투옥·결혼'편을 들 수 있다.

김 기자는 이 기사에서 이원수 선생은 물론 나영철·김문주·제상목·양우정·황갑수 씨 등이 함께 일제경찰에 검거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형을 살았던 사실을 상세하게 썼다.

<경남신문>이 "(이원수 선생 등) 3명의 수감 및 출옥일자와 판결문 등 구체적인 행형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제 씨와 황 씨의 재판결과를 미뤄볼 때 이원수 선생도 상당 기간의 옥고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한 것과 달리 김훤주 기자의 기사는 35년 4월 마산형무소로 옮겨 재판을 받아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에 처해졌고, 36년 1월 30일 석방된 날짜까지 확실히 보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 기자는 이같은 내용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 그거요?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이원수 문학전집> 연표에도 다 나와 있고, 생전에 선생이 직접 쓴 글에도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과연 그랬다. 1984년 출간된 <이원수 문학전집>(전 30권)의 연보에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1935년 25세, 2월에 반일(反日)문학 그룹 ‘독서회(讀書會)’사건으로 함안에서 피검되다. 나영철(羅英哲)·김문주(金文株)·제상목(諸祥穆)·양우정(梁雨庭)·황갑수(黃甲洙)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언도 받고 마산과 부산에서 1년간 영어생활(囹圄生活)을 하다. 옥중에서 동시 〈두부 장수〉를 쓰다. (발표는 1981년에 하다) / 1936년 26세, 1월30일에 출옥하다."

이원수 선생이 생전에 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털어놓고 하는 말·2》뿌리깊은나무,1980.11. 5)에도 이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역시 웅진출판에서 나온 <아동과 문학>이란 책에도 이원수 선생이 쓴 '나의 문학 나의 청춘'이란 글이 있는데, 여기에도 예외없이 이 내용이 나온다.

결국 <경남신문>의 경우 순진하게 '비전문가'인 마산보훈지청장의 말만 듣고 썼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라면, <조선일보>의 경우 <경남신문>에 보도된 걸 보고 자사의 홍보에 이용하려 했거나, '창업자 친일행각 물타기'(프레시안의 표현)에 급급했던 나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보도한 혐의가 짙다.

더구나 이후 변절해 친일시를 쓴 사실까지도 알았더라면 <조선일보>가 어떤 입장을 보였을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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