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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의 뜻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학교에 배워서 아무나 아는 정도는 아니지만, 발트3국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발트3국이야기'를 읽지 않았다 할지라도 탈린이 '덴마크인의 도시'라는 뜻이 있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어를 살펴보면 에스토니아어로 덴마크인을 일컫는 말은 taanilane, 그 중에 taani는 영어의 Danish처럼 덴마크라는 명사의 형용사형이고 lane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리고 linn은 에스토니아어로 도시라는 의미이다. 그 두 단어 taa-와 linn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볼 수 있지만, 본인이 에스토니아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라고만 대답할 뿐 확실히 그렇다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본인의 의견을 물어본다면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것이다. 탈린을 처음 세운 사람은 덴마크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가의 기원을 두고 리가를 건설한 사람이 독일인 알베르트 신부가 맞느냐 아니냐 논쟁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처럼 에스토니아 역시 그 원거주민을 두고 끊임없이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중이다.

에스토니아 역시 다른 발트3국처럼 기독교화가 늦게 진행되었고, 자신들의 신앙에 바탕을 둔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트비아처럼 12세기 독일인들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한 이전에도 이미 에스토니아인들이 직접 세운 교회가 존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에스토니아에도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독일인이 진출하면서 에스토니아에 전파하기 시작한 정치적 권력으로서의 기독교는 라트비아에서와 마찬가지로 극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본격적인 독일인들의 선교활동은 독일 브레멘의 주교 알베르트공이 현재 리가에 진출하고 난 후라고 할 수 있다. 1208년부터, 기독교화하려는 독일인들뿐 아니라 러시아, 스웨덴 사이에서 에스토니아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강렬해지자 브레멘의 알베르트 공은 덴마크의 왕 발데마르와 손을 잡고 연합을 구성하였고, 1219년 발데마르는 현재 탈린 자리에 도시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탈린 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서 발데마르는 거의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발데마르가 철수를 결정하고 덴마크로 돌아가려 하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하얀 십자가가 가운데 있는 빨간 깃발이 내려와 발데마르의 손에 떨어졌고, 그것을 신의 뜻으로 여긴 발데마르는 용기를 얻어 마침내 탈린을 공략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덴마크의 국기로 쓰이고 있는 국기는 당시 발데마르 손에 쥐어진 그 깃발이라고 한다. 처음 들어와 정착하고 있던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그런 사연으로 탈린은 정말 '덴마크인의 도시'가 되었고, 1346년 덴마크가 탈린을 리보니아에 은 약 4.5톤에 팔아 버릴 때까지 덴마크왕의 손에서 역사를 맞게 된다.

역사상으로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그렇지만, 민속과 설화상으로 남아있는 '야사(!)'를 보면 좀 다른 이야기가 적혀 있음을 보게 된다. '프리드리히 크로이츠발드(Friedrich R. Kreutzwald)'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 구전되는 전설과 민담을 바탕으로 에스토니아의 건국서사시 '칼렙의 아들(Kalevipoeg)'을 저술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칼렙의 아들'은 핀란드의 역사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데, '칼레발라'란 핀란드 전역에서 불리던 조국의 기원과 조상들의 업적에 관한 50여 편의 민요를 엮은 작품으로, 1835년과 1849년 두 차례에 걸쳐 핀란드의 시인 리온로트(Lionrot)가 수집 정리한, 핀란드 문학의 기념비 같은 작품이다.

호머가 쓴 '일리아드 오딧세이'와 같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로, 핀란드의 영토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농업과 수공업이 어떻게 시작하였는지를 노래하는, 말하자면 핀란드의 창세기와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와 비교하여 여성의 활약이 상당히 부각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크로이츠발드의 '칼렙의 아들'은 그 칼레발라의 구성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역시 에스토니아 전역에 불리던 민요들을 정리하여 편찬한 책으로, 핀계 민족의 후손으로서의 공통적인 이상을 표현하는 에스토니아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로 불린다. 마법, 신들의 이야기로 가득찬 이 이야기는 1861년 완간되어 19세기 에스토니아를 온통 자유의 정신으로 들끓게 했다.

'칼렙의 아들'에는 탈린의 전설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에스토니아국을 건설한 거인 칼렙의 아내 린다는 남편이 죽자 그의 무덤을 표시해 두기 위해서, 무거운 돌을 산 위로 가지고 가려했으나, 돌이 갑자기 너무 무거워져 그 돌을 바닷가 근처에 떨어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 돌이 떨어진 자리는 현재 에스토니아의 국회가 자리잡은 톰페아(Toompea)언덕이 되었고, 돌을 떨어뜨린 린다는 슬픔이 북받혀 그만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는데, 그 눈물이 고여 흘러흘러 윌레미스테(Ulemiste)란 호수가 되어버렸다. 윌레미스테 호수는 실제로 탈린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작품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 탈린은 독일인이나 덴마크인이 아닌 핀족에 의해서 건설된 도시로 묘사되고 있다.

탈린은 영원히 건설이 끝나지 않는 도시라는 말이 있다. '칼렙의 아들'에서 보면 가끔씩 그 윌레미스테 호수에서 작은 난장이 하나가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탈린이 다 지어졌는지 물어본다고 한다. 만약에 탈린 건설이 끝났다는 말을 그 난장이가 들으면 그 호수물로 탈린시를 침수(沈水)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 난장이에게는 아무도 탈린이 다 지어졌노라고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윌레미스테 호수에 산다는 작은 난장이는 탈린의 명물로서 기념품 상점에서 많이 팔리고 있는 인형의 주인공 중 하나이다. 노르웨이의 티롤이나 아일랜드의 레프레컨처럼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탈린 여기저기에서 귀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시청 광장 첨탑에 서 있는 토마스 할아버지가 아니다!)

덴마크인들과 독일인들의 진출은 700년 동안 지속된 외정의 서막에 불과하다.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와 함께 독일인들의 건설한 리보니아의 한 부분으로 존속하게 되는데, 리보니아 초기 외국인들의 폭정에 한계를 느낀 에스토니아인들은 1346년 4월 23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성 유리 일의 폭동'으로 기록되어 아직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반란은 몇 달 후 서부와 섬지역까지 파급되었고, 리보니아 기사단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만 2년이 넘게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끝내 그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리보니아와 주교구의 폭정은 더 심해진다. 1500년대 중반 탈린, 타르투(Tartu), 빌랸디(Viljandi), 패르누(Parnu) 등의 도시는 한자무역도시의 일원으로 번영을 이루고, 한자무역도시로서 많은 특혜를 받지만, 대다수의 도시에 사는 에스토니아인들은 농노로서만 존재할 수가 있었다.

1558년부터 1626년까지 진행된 러시아, 리보니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연합국, 스웨덴, 덴마크 등이 참가한 전쟁으로 인하여 온 라트비아를 비롯한 에스토니아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한다.

폴란드와 스웨덴은 러시아를 리보니아에서 몰아내고, 폴란드는 에스토니아 남부를 스웨덴은 북부를 차지함으로 전쟁은 일단락 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이어진 기근과 질병으로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북부를 차지한 스웨덴은 에스토니아인들을 개신교로 개종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고, 에스토니아 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힘을 기울여, 1739년에는 성경이 에스토니아어로 완역되며. 1632년은 특히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 타르투에 대학을 설립하여, 대 에스토니아 정책의 꽃을 피우게 된다.

에스토니아는 그 후로도 독일과 러시아 등의 강대국 사이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채 1차 대전까지 이르게 되고, 2차 대전 후 소련의 공화국으로서 1991년 이후 독립을 할 때까지 세계사의 기억에서 잊혀진 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에스토니아어로 독일인은 saksa(삭사)로 불린다. 원래는 색슨족을 의미하는 것이었던 이 단어에는 독일인이라는 뜻 이 외에 '주인, 나으리'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한다. 역사를 통하여 에스토니아 전 영토를 좌지우지한 외부인들을 현지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식으로 탈린을 휩쓸고 지나간 북유럽, 동유럽, 러시아 문화는 다양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양파모양을 한 러시아 정교회부터 시작해서 뾰족뾰족 탈린의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고딕양식의 교회와 바로크식 건물들이 한자리에 존재하여, 주변국가와 비교해서도 상당히 독특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탈린은 한번 가보면 정말 인상에 많이 남는 도시이다. 한반도를 떠나 이 땅끝 같은 곳에까지 밀려나와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의 핏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에스토니아인이 겪었던 반목과 압박의 역사는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자료를 발트 현지에서 수집하였으므로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에서 불리는 현지음가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발트3국에 대한 필자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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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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