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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서역을 초저녁에 출발한 기차는 허무한 꿈으로 유명한 한단(邯鄲)을 지나고, 중국 문화의 초석을 세운 황허(黃河)와 닿은 정저우(鄭州)를 지났다. 딱딱한 의자에서 열매들을 까먹으며 무엇인가를 말하는 중국인들은 이미 피곤한 잠을 뒤척이고 있다. 나 역시 졸립기는 마찬가지다.

새벽녘 기차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창지앙(長江)의 기운은 여느 중국의 산하보다 훨씬 무성한 들판의 푸르름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강의 신은 멀리서 찾아온 이방인에게 자신을 숨기듯 습한 안개로 사방을 가두어 놓았다.

우리에게 흔히 '양쯔강'으로 불리는 창지앙(長江)은 황허와 더불어 중국 문명 문화의 가장 큰 태동지이다. 황허의 주변이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지역이라면 창지앙은 주(周)나라부터 영역이 확대된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큰 변혁을 겪은 곳이다. 특히 '삼국지'의 역사적 근거가 된 위, 촉, 오는 창지앙을 중심으로 나누어진 국가들이다.

그곳에서 중국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중국 문학사상 가장 스케일이 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탄생하게 된다. 창지앙의 여행은 당연히 다른 교통편보다 충칭에서부터 상하이까지 길게 연결된 뱃길을 따라 가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 것이다. 몇 차례 여행으로 기자가 창지앙의 얼마를 느낄까마는 '삼국지연의'라는 책으로 조금이나마 창지앙과의 거리를 좁히지는 않을까 기대해 본다.


젊은 이들에게 용기와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전범

갈 곳을 찾지 못하던 한(漢)왕조는 영제(靈帝)시대인 서기 184년 장각이 일으킨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더욱 급속한 혼란의 시기로 접어든다. 하지만 춘추전국의 혼란은 세상은 물론이고 산중에 은인자중하던 이들을 불러내게 된다. 물론 그럴 때일수록 더욱 깊이 숨는 이도 있고, 그 혼란의 반대에서 은자의 학문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당시는 유비, 조조, 손권이라는 세 영웅을 기본으로 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들의 기록은 수많은 기록의 과정을 거친 후 나관중이라는 걸출한 작가에 의해 소설로서의 큰 무게를 갖게 된다.

우리에게도 삼국지는 결코 낯선 작품이 아니다. "삼국지는 젊은 날에 읽지, 늙어서는 읽지 말라"는 말이 있어, 삼국지가 젊은 이들에게 세상에 대한 야망을 키우고, 권력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는 책으로 인정받아왔다. 삼국지가 읽는 이들의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많다. 인간세상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권력과 사랑과 우정 등 가장 흥미로운 요소들이 가장 유효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한 시기가 삼국시대라면, 창지앙은 그들의 싸움을 시종일관 지켜보면서 때로는 수만의 생명들의 피를 스스로 받아들이며, 때로는 분노하며 역사를 지켜왔다. 삼국지의 주무대는 뤄양(洛陽)이나 창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 등 큰 성들도 있지만 가장 큰 격전지나 흔적은 세나라의 중간에 위치한 창지앙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볼 수 있다.

창지앙을 중심으로 위쪽은 걸출한 책략으로 유명한 조조(曹操)의 위(魏가) 차지했고, 남쪽은 손책의 대를 이은 손권(孫權)의 오(吳) 나라가 차지했다. 지금의 쓰촨 방면은 관우, 장비 등과 각별한 우의로 유명한 덕장 유비(劉備)의 촉(蜀)나라가 차지했다. 따라서 창지앙을 따라가는 여행은 창지앙 자체의 긴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중국 기록문화의 진수인 삼국지를 느끼면서 더듬으며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기자가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만난 창지앙의 몸체는 쿤밍, 따리를 지나 만날 수 있는 리지앙(麗江)에서 50km쯤 들어간 창지앙디이완(長江第一灣)이다. 창지앙이 처음으로 그 큰 몸통을 트는 곳이라 해서 이름 붙어진 이곳에서 창지앙의 작은 이름은 진사지앙(金沙江)이다. 린피아오(林彪)가 이끄는 중공 홍군의 2부대들이 도하해서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첫 번째로 고개를 돌리지만 창지앙 6000km는 칭하이성(靑海省)의 서부 커커시리(可可稀立)산맥에서 그 물줄기를 시작한다. 그 물줄기는 때로 갈라지고, 합쳐져서, 이곳을 지나고 충칭, 웨양, 우한, 주장, 난징을 거쳐 상하이에 이른다. 발원지 근처에서는 하늘과 통하는 강이라는 의미를 담은 퉁톈허(通天河)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쉽게 닿을 수 있는 창지앙의 여행은 충칭(重慶)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상하이에서 이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어서 유명한 도시기도 하다. 중국 대륙에까지 손을 뻗힌 일제를 피해 어려운 길을 걸어온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그 큰 강을 중심에 두고 크고 작은 산들로 채워진 도시에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임정의 요인들이 떠난지 반세기를 휠씬 넘긴 임정청사는 각계의 도움으로 깨끗한 모습으로 단장되어 오는 이들을 반긴다. 그곳에서 시작하는 여행은 당연히 유유히 창지앙을 오르내리는 선박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창지앙을 여행하는 선박은 여객선은 정기선과 유람선으로 나누어진다. 유람선은 비용도 비싸지만 여행객이 중심이어서 삼국의 후예들을 만나는 데는 불편하다.

반면에 정기선은 여행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의 이동을 위한 배다. 하지만 중간에 있는 경우지 중에 하나를 잡아내리는 방법은 여행의 흥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정기선으로 충칭에서 창지앙의 중간도시인 우한(無漢)까지는 2박3일이고, 유람선으로는 3박4일이다. 이 여객노선은 정확히 창지앙의 중류를 여행하는 길이라고 보면된다.


완셴, 백제성, 산샤 등 명승 가득

삼국지가 최고의 문학서로도 읽히는 곳은 이 짧지 않은 소설 안에 삶의 희노애락애오욕이라는 인간의 기본 정서가 곳곳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로 대표되는 우정,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기울인 '삼고초려'의 노력은 물론이고, 초선을 놓고 벌이는 동탁과 여포의 관계, 군율을 세우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마속을 처형하는 공명의 모습, 반골상을 가진 인물로 조조를 돕지만 결국 반기를 들어 진(晋)왕조의 기틀을 세운 사마 중달 등 삼국지는 인간 관계의 모든 면을 한권에 보여준다. 삼국지가 사람관계의 큰 틀을 보여준다면, 창지앙은 중국의 거대한 영토를 흐르며, 중국의 모든 면에 걸쳐 있다.

이 길에서 처음 만나는 삼국지의 유산은 완셴(万縣)의 북쪽에 있는 천성산(天城山)이다. 221년 유비는 촉한을 세우고,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기 이 길을 지나 싸움에 나섰으나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후하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병사했다. 유비가 숨을 거둔 백제성도 창지앙의 중앙에서 만날 수 있다.

완셴에서 50km정도 떨어진 비봉(飛峰)은 호걸 장비의 무덤이 있고, 제갈량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팔동도도 만날 수 있다. 역시 중간인 우샤(巫峽)에서는 제갈량이 썼다는 글을 볼 수 있는 집선봉(集仙峰)이나 그가 병서를 두었다는 흔적도 볼 수 있다. 길의 중간에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창지앙산샤(長江三峽)를 유람하면서 중국의 기세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창지앙에서 만나는 삼국지 관련 최대 유적은 웨양(岳陽)을 막 지나서 있는 치비(赤壁 적벽)일 것이다. 치비은 당시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조조를 제갈량의 지략과 손권의 군대가 연합해서 대파한 가장 큰 획을 긋는 장소 중에 하나다. 이 일을 계기로 유비는 중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인 형주를 보유하게 되고, 삼국은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물론 나중에 형주의 영유 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죽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지만 치비는 제갈량의 뛰어난 전략과 호풍환우하는 능력 등으로 인해 삼국지의 가장 중심에 서는 부분이다.

역사는 흘러 삼국을 정돈하는 것은 유비, 조조, 손권의 후사가 아닌 조조의 지략가 사마의와 그의 후손이다. 그들은 통일 진(晋)을 만들어냈다.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는 세력간의 혼재된 투쟁을 통해 통일을 이루어가는 단초를 보여준 흥미로운 사례다.

창지앙은 긴 시간 동안 때로는 피로 자신을 적시며, 때로는 안전하게 서로를 방어하는 진지의 역할을 하며 역사를 거슬러 왔다. 창지앙의 충칭을 출발해 치비, 우한, 난징을 지난 배는 상하이에 여행객들을 내려놓는다. 근대 이후 상하이는 세계 문화의 용광로가 되어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 역사의 격류를 신랄하게 보여주는 창지앙을 여행하며 읽는 삼국지는 또 다른 흥미를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책소개) - 이문열 본은 읽기 쉽고, 김구용 본은 원전에 충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엄밀히 말하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다. '삼국지'는 진수(陳壽 233~297)에 의해 쓰인 역사서로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에 대한 기술이다. 반면에 우리가 읽는 '삼국지연의'는 작가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쓰여진 중국 4대 기서(奇書) 가운데 하나다. 이 글은 삼국지 등 다양한 기록을 중심으로 해서 소설화한 것으로 유비를 높이 보는 관점이 중심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연의를 대부분 삼국지로 명명한다. 삼국지는 중국에서와 많이 읽혀진 글이다. 하지만 국문본으로 읽혀진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부터다. 박종화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국문본 삼국지를 내놓기 시작했다.   
현재 국내에서 출판된 삼국지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것은 이문열이 한글세대에 맞게 쉽게 편역한 책이다. 올해 김구용에 의해 번역된 '정본완역 삼국지'(솔)는 원본에 충실한 책이다. 글수레에서 변역한 만화 삼국지는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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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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