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가. 북한의 새 지식을 알려 주는 만화책?

1980년대 첫머리에 `무궁화문고'나 `해돌이문고'란 이름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내용, 북한의 새 지식을 알려 주는 책"이라 하면서 북녘 현실 이야기를 만화로 담았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만화는 책으로만이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 자주 극장에서 막을 올렸고 그다지 볼 만한 볼거리가 없던 때라 어머니들은 아이 손을 잡고 극장에 갔지요.

그제 용산 <뿌리서점>에 가서 <유 철-하얀 꽃가루(1982)>란 책을 만났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벗과 같았던 만화책인데 `자주 보았던 기억' 탓에 반가웠을 뿐 만화 속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닥 반갑지는 않은 책입니다. <하얀 꽃가루>란 만화를 보노라면 "마약 해시시의 출처를 찾는데... 이것이 지난날 북괴 잔당이 남아 마약범을 움직인다는 단서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북괴'는 온갖 파렴치한 짓을 하고 마약 문제까지 터뜨리는 못된 집단이라는 이야기로 만화를 끝맺은 뒤 `간첩이란'이라 하며 짧은 만화를 싣네요. 여기에서 "쌀 800g을 달라고" 하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하는군요. 남녘에서는 쌀을 `g(그람)'으로 팔지 않으니 이렇게 말하면 간첩이라면서...(이 대목은 관련 사진을 보세요)

<하얀 꽃가루>라는 만화책을 살펴보면 `아이들에게 일러준다는 북한 새 지식'은 없습니다. 모두 `북괴 빨갱이 때려잡자 김일성' 이야기뿐입니다. 북녘 사람들 삶이 어떠한지, 앞으로 남과 북이 하나될 날일 떠올리며 어떻게 서로를 헤아리고 보듬을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지요.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삼고 싸우고 다투고 의심하도록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아직도 `북괴'란 말을 없애야 하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수준이지요.

▲반공만화 한 대목
<하얀 꽃가루> 이야기를 끝낸 뒤 `부록'이라면서 `간첩을 알아내는 방법' 두 가지를 만화로 담았습니다. 만화가들도 정부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이런 만화를 그리기도 했겠지만, 우리가 힘을 모아 맞서면 이처럼 서로를 악다구니처럼 헐뜯는 만화를 그리지 않고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습니다.
ⓒ 2001 최종규


나. 추운 겨울날

날이 추워 <뿌리서점>은 이제 문을 닫아놓고 있습니다. 바람이 쌀쌀하게 불던 때에도 문은 열어놓고 있었으나 이제는 문을 닫아놓고 사람들이 거의 모두 책방 안에 옹기종기 다닥다닥 난로가에 모입니다. 난로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책을 보노라면 손도 얼고 발가락도 업니다. 그래서 난로 가까이에서 불을 쬐며 언 손과 발가락을 녹이면서 책방 안을 살피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책방 안으로 모이다 보니 책방 안에서 이야기를 자주 나눕니다. 아저씨들은 명성황후 사진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나눕니다. 과연 진짜로 명성황후 사진이 남아있는 것이 있느냐, 지금 나도는 사진들이 진짜 명성황후인가 하면서요. 이야기는 민비를 일본깡패들이 죽일 때 `사진을 보고' 확인하고 죽였을 테니 있기는 있겠으며 비솝 여사가 쓴 글을 보면 당신이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 있기에 그 사진이 어디엔가 있을지 모르나 지금 나도는 사진 가운데는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사진은 없다는 말로 끝납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 <뿌리서점> 사장님
<뿌리서점>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당신들이 꾸리는 헌책방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에게 커피를 `적어도 한 잔'씩 대접합니다. 한두 시간 즈음 책방에서 책을 보고 있노라면 새로 오신 손님에게 대접하는 차와 함께 또 다시 한 잔을 받고... 서너 시간 있노라면 또 다시 한 잔을 받지요.
ⓒ 2001 최종규

그리고 <백범일지> 이야기가 나왔지요. 중국에서 일찌감치 한문으로 나온 뒤 나라 안에서는 해방 뒤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이야기. <뿌리> 사장님이나 다른 아저씨들은 긴가민가 하셨으나 저도 고등학생 때 <백범일지>를 읽으며 머리말에서 `왜 <백범일지>를 한문으로 썼을까? 그리고 왜 나중에 후손들이 번역했다고 밝힐까?' 하며 궁금해 했습니다. 이제 이만큼 나이도 먹고 세상경험도 하나둘 해가면서 배우다 보니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몰래 한문으로 책을 펴냈음'을 알고 배웠지만 그때는 어엿하게 있는 한글을 두고 왜 한문으로 책을 낼까 싶었죠.

그리고 `게일'이란 분이 낸 사전이 1800년대판과 1911년판과 그 뒤에 다시 한 번 나온 판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내용이 모두 다르며 이 세 가지 사전을 영인본으로라도 찾아서 견주면 우리 말 모습을 두고 많은 것을 읽어내고 알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1911년판 영인본만 있고 다른 판본 영인본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11년 판본만 널리 보급되었다는군요.

다. 우리가 싸우고 찾아야 책을 손에 쥔다

▲북녘 낱말책 <중조사전(1983)> 속종이
겉장은 정부가 양장으로 새로 씌웠고 속종이는 그대로 살려 두었습니다. 물 건너 일본도 중국도 저 먼 미국도 유럽도 어렵잖게 갈 수 있으나 바로 코앞 북녘은 찾아가지도 못할 뿐더러 북녘 책은 손에 쥐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북녘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과 북녘 학문을 함께 나누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2001 외국문도서출판사

<뿌리서점>에서 엊그제 건진 책 가운데 <중조사전, 북조선(1983)>이 있습니다. 이 낱말책은 우리나라 정부가 1988년 민주화 물결과 함께 쏟아지는 북녘 자료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발맞추고자 "북한 원전을 빼지도 보태지도 말고 전후를 가려 골고루 사실대로 제공함으로써 뜻하지 않은 오해와 이후의 불신을 미리 씻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따라 나왔습니다.

곧 1945년부터 1988년까지는 일반 사람들은 북한에서 나온 책을 갖고 있을 수 없었지요. 남과 북이 갈라졌다 하여도 학술과 문화는 서로 주고받아야 뒷날 함께 살아갈 나날을 채비할 수 있지요. 그러나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하나됨보다 정권 이어가기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기에 우리들은 학문을 하려 해도 반편이 학문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에 거세게 일어나 민주주의와 노동권리를 주장하고 외쳤기에 그 힘이 발판이 되어 정부도 자기들 품 안에만 꽁꽁 숨겨두었던 북한 원전을 `영인본으로 공개 소유'하여 개인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바라지 않고 독재자 군화발에 그대로 짓밟혀 지냈다면 <중조사전> 같은 낱말책을 제가 손에 쥐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 낱말책을 갖고 있던 헌책방도 `국가보안법 위반-불온서적 소지 및 유통 혐의'으로 구속되고 책방 문도 닫고 벌금도 물어야 했겠죠.

라. 겨울과 따뜻한 차 한 잔

<뿌리> 아저씨는 언제나 모든 손님에게 차를 한 잔씩 대접합니다. 차(거의 커피)를 반기지 않는 사람도 많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차를 한 잔씩 건네는 마음은 "물을 너무 빨리 마시려 하다가 목에 사래들지 말라는 버들잎"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천천히 차 한 잔을 느끼면서 자신이 바라는 책도 살펴보고 여러 가지 수많은 책들을 한갓지게 훑으면서 많은 책을 느끼면 어떻겠냐는 뜻도 담고 있지 않을까요. 세상에는 참말로 수백 수천만 권이라고 해도 담아내지 못할 만큼 책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책들은 헌책방에 들어왔다가 나가고 쌓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세상엔 온갖 책들이 있는 만큼 온갖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책방에 있는 책 가운데 너절하고 싸구려라 하여 `책 아닌 책'도 없지요. 겉보기나 책값이나 다른 무엇을 가지고 "너는 책이 아니다" 하고 말할 수 없답니다.

헌책방에서 이런 `책 이야기'를 느낀다면 우리 언저리에서 만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싹틀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사람을 넘어 모든 생명체와 마주서는 마음도 다지고요.

따뜻한 차 한 잔은 한꺼번에 마실 수 없습니다. 천천히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셔야 혀도 안 데지요. 사람을 마주할 때도 책을 마주할 때도 한 번에 손쉽게 가까이하고 끝내버리려 하면 좋은 사람 관계도 좋은 책 관계도 맺기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겨울에 나누는 <뿌리서점> 차 한 잔에서 이런 마음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용산역 언저리 <뿌리서점> : 02) 797-4459

* 전철(국철/1호선) 용산역에서 내려 용산역광장쪽으로 나와 `용사의 집' 뒤편에 있는 주택가 큰길로 빠지면 조촐한 헌책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뿌리서점>은 낮 두 시 넘어서 연 뒤 자정까지 가게를 열어둡니다. 쉬는 날은 따로 없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