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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값싼 책들

<규합총서 교주본>을 그제(11/26) <정은>에서 건졌죠. 이 책은 신구문화사에서 문고판으로 1974년에 펴냈답니다. 1974년 책값이 360원. <일제시대의 항일문학>은 400원입니다. 1975년에 나온 <김수영-거대한 뿌리, 민음사>는 500원입니다. 1977년에 나온 창비시선은 700원이니 해마다 책값이 많이 올랐음도 살필 수 있겠더군요. 그러나 1975년에 나온 <신기철,신용철-새 우리말 큰사전, 서울신문사>는 무려 1만9700원입니다. 허웅 스승이 1976년에 번역한 <용비어천가, 정음사>는 책값이 1000원. 1978년 한길사에서 나온 <김정한-낙동강의 파숫군>은 1500원입니다. 이런 값들을 놓고 보면 문고판 <규합총서>가 무척 싼 값에 나왔음을 알 수 있겠죠.

요즘 문고판 가운데 가장 싸다고 할 책은 역시 대원사 "빛깔있는 책들"로 4800원입니다. 창해ABC나 시공디스키버리총서는 7000원, 8000원을 웃돌고 있어서 문고판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이지요. 범우사 문고판도 값이 꽤 비싸답니다. 대원사에서 출판사 자체 이익을 적게 남기며 `독자우선주의'를 하는 일을 생각하면 다른 출판사들은 책 보급과 대중화를 그다지 신경쓰고 있지 않고 있는 현실이지요.

<규합총서> 같은 고전은 처음 나올 때부터 널리 읽힐 목적으로 만든 책입니다. 그래서 이를 요샛말로 다시 펴낼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사서 볼 수 있도록 `문고판'으로 자그맣게 만들고 값도 싸게 해야 알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출판문화 현실은 이와는 거꾸로 가고 있어요. 너무 겉을 번지르르하게 꾸며서 책값은 책값대로 비싸고 잘 내지도 않으니 사서 보기가 힘들죠.

다른 나라(외국) 고전은 책방에 가득하고 손쉽게 사서 읽을 수 있지만 우리네 고전은 펴낸 숫자도 적고 책값도 비싸서 사 읽기가 힘들답니다. <정은>에 가 보면 마치 `문고판 전시장'이라도 되는 듯 갖가지 문고판이 가득합니다. 이곳에서 눈에 띄는 문고판으로 분도출판사에서 낸 녀석도 있고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문고판도 눈에 띄지요. 요새 중앙일보사는 중앙M&B라는 이름으로 돈 되는 책만 펴내고 있답니다. 중앙일보사는 지난날 자신들이 문고판으로 값싸게 양질 책을 냈던 일을 떠올려야 합니다. 신문도 똑바로 만들어야겠지만 책도 똑바로 제대로 만들어야죠.

대중성과 책 값어치

지난 달에 나온 <어린이공화국 벤포스타>란 책을 두고 윤구병 선생님은 "그 책을 만드는데 걸린 시간과 공을 생각하면 책값이 비싸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책값만 일대일 절대비교를 한다"면서 그래서 책을 만드는데 든 공이나 시간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덧붙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래 공과 시간을 들어 열매맺은 이야기를 혼자 나눌 생각이 아니고 책으로 펴낸다고 생각하면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대중성'입니다. `책을 읽는 대중'들은 얼마나 그 `공과 시간을 들인 값진 책'을 손쉽게 집고 찾아서 읽을 수 있느냐죠. 누구나 손쉽게 도서관을 찾아가서 책을 볼 수 있는 사회 환경과 문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은 만큼 `책 유통'은 책 문화에서 크게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렇기에 짐스럼(부담)없이 사볼 수 있도록 `공과 시간을 들인 책' 책값을 매기는 일도 중요합니다.

<벤포스타>란 책은 일반 책보다는 작은 판이지만 문고판보다는 큰 책입니다. 이 책을 문고판 크기로 값싸게 만들고 종이질도 조금 낮췄다면 - 사실 재생지치고는 재생지 티가 안 나리만치 너무 좋은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 우리는 이 책을 더 손쉽게 사 읽을 수 있지요.

`느림' 자체도 잊어야 `느림'이지

요즘 우리 삶은 `빠르기'만이 앞서 있습니다. 어디서 무얼 하든 `빨리' `먼저'고 `으뜸' `일류' `최고' 아니면 제 값어치를 못 받습니다. 일자리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야 사람들이 몰리지요. 그러나 일한 만큼 보람을 찾는 일에는 눈길을 두지 않지요. `느림'이란 굼벵이처럼 느리다는 `느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삶이 제 빠르기를 넘어서서 "빨리 죽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에서 벗어나자는 느림입니다. 너무 빨리 가고 있으니 발걸음을 죽이자는 얘깁니다.

헌책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책다운 책이 없어서" 장사할 맛이 안 난다는 얘기를 할 만큼 출판사들은 책다운 책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도 `빨리 책을 만들어내고 돈도 빨리 많이 벌어들일 수 있는 책'에 눈독을 들인 탓이 큽니다. 헌책방은 `책손님이 반가와 할 값지고 훌륭하고 멋지다는 책'만을 갖추지 않습니다. 헌책방은 말 그대로 `헌책'이라면 온갖 꼴을 갖춘 책을 책방에 쌓아두지요. 이 안에서 `진주'를 캐고 `옥'을 찾는 일은 바로 책손님이 할 일입니다.

인터넷에 책 목록을 쭉 올려놓아 자기가 찾는 책을 손쉽게 찾도록 하는 일도 좋지요. 그 `빠름'도 참 훌륭하고 쓸모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빠름'을 좇는 삶 속에서 놓치며 스쳐지나가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성장만을 외치고 `경제 문제'만에 매달린 탓에 수천 수만이 훨씬 넘는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어 거리로 몰려나오는 일을 너무도 우습게 여기고 맙니다. 그래서 `정리해고'는 당연한 일로 여겨버리죠.

얼마 앞서 십만이 넘는 농민이 상경투쟁을 하겠다 했으나 경찰들이 모가지 비틀 듯 막아서 고속도로를 막고 엄청난 시위를 했습니다. 언론매체와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은 "농민들 요구는 정당하다. 하지만 방법이 틀렸다"는 똑똑한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농민들 또한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장' 희생양이 되어 애써 지은 농산물들이 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또한 `빠름'에만 눈길을 둔 우리들 현실이 빚어낸 아픔입니다.

함께 걷는 길

김남주 씨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노래했습니다. 경제만 앞서가는 것도 아니고 사회만 먼저 가자는 것도 아닙니다. 돈만 많이 벌기보다 문화생활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책은 어떻겠습니까? 책을 찾는 책방은? 헌책방은?

어제(11월 27일) <정은서점>을 다시 찾아가서 맡겨 두었던 <한글문화자료집> 세 권과 1947,1948년에 나온 교과서 네 권과 <우표요론(1969)> <남북한말비교사전(1995)> <양성우-낙화(1985)> <서대문형무소, 열화당(1988)> <정호경-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분도출판사(1984)> <그 날이 오면, 정음사(1974)> <유태종-한국의 명주, 중앙일보사(1978)> <손석춘-여론 읽기 혁명, 한겨레신문사(2000)> 들을 더 골랐습니다.

짧게는 몇 달 앞서 나온 책부터 길면 쉰세 해가 되는 책까지 골랐습니다. 앞서 가고 빨리 가기만을 바란다면 나온 지 한 달, 아니 며칠만 지나도 `낡은 책'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새로 나온 책이라 해도 오랜 세월을 곰삭고 준비해서 나왔음을 떠올려야겠습니다. 1947년 <중등수학> 교과서를 엮으려고 지난 수천 해 동안 거듭난 수학밭 연구물을 모았을 테며 손석춘 씨가 <여론 읽기 혁명>을 내려고 여러 해 동안 <한겨레>에 싣던 글을 모았습니다.

<한국의 명주>란 책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한아비(조상)들이 빚어온 술이 있었지요. 오랜동안 집집마다 내려오고 고을마다 내려온 `전통술'이 없었다면 <한국의 명주>란 책은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느림'이란 바로 이러한 앎과 슬기를 깨우치자는 말입니다. 오래 오래 이어온 앎과 슬기를 소중히 여겨 스스로 곰삭이고 이웃과 나누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날이 오면>이란 시모음이 193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읽히듯 언제나 우리 곁을 아름답게 수놓는 이야기를 만들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혼자 앞으로 백 발자국 가기보다 백 사람이 어깨동무하고 노래도 부르고 신나게 놀이도 하면서 한 발자국 가자는 말이지요.

<중앙일보>와 <중앙M&B>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도 `중앙일보 책 소개' 이야기가 올라온 적 있습니다. 책 이야기를 `문화'가 아닌 `오락 연예' 쯤으로 다루는 - 기사에서 `엔터테인먼트 섹션'에 책 이야기 있답니다 - <중앙>이 참으로 생각이 있는지 묻고 있죠. 시대를 앞서가고 뭐를 앞서간다는 <중앙>이 책을 이처럼 다루는 일이 `시대를 앞서가는 일'이냐고 다시 묻기도 합니다. 그런 <중앙>이지만 70년대엔 자그마한 문고판으로 `중앙신서'를 펴냈습니다.

<중앙신서>는 바로 그와같은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새로운 안목과 새로운 `스타일'로 기획된 책이다. 이것은 후세에 물려주는 우리의 지적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밝은 눈과 원숙한 지성과 품격의 지남침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중앙>에서 내는 책은 `후세에 물려줄 만한 지적유산'도 `오늘을 살아가는 밝은 눈'도 `원숙한 지성과 품격의 지남침'도 될 만하지 못합니다. 한때 잘 팔릴 만한 책으로 가득하고 한 번 읽고 버리기에 알맞은, 어쩌면 거들떠볼 만한 값어치도 갖추지 못한 책이기 일쑤입니다.

세월을 묵고 세월을 거듭날수록 더욱 더 아름다워지잖고 되레 거꾸로 가는 까닭은 무얼까요? 처음엔 높고 해맑은 뜻을 가졌다가도 뒤처지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만 하는 까닭은 또 무얼까요? 모든 뿌리는 아니겠으나 `빠르기'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서로 아름답게 어깨동무하며 한 걸음씩 내디딛기보다 자기 뱃속을 채우는 일에 앞장선 탓도 크지 싶습니다.

아쉬운 `그 날이 오면'

`전집'은 어느 훌륭한 한사람(개인)을 기리며 그이에게 많은 것을 본받고 배우자는 뜻에서 펴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전집'은 되도록 널리 읽힐 수 있도록 펴내야 좋습니다. 그리고 `전집'은 오래도록 둘 수 있도록 `소장본'을 만들 찾을모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 책 문화는 `소장본 전집'만 만들고 `보급하는 전집'은 전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심 훈 전집>도 양장으로는 나오겠으나 문고판으로 값싸게 사 읽을 만한 판형으로는 나오지 않죠. 오직 하나 있다면 외솔 스승이 낸 책은 정음사 문고판으로 전집이 다 나왔다는 것 하나. 정음사를 외솔 스승이 열었기에 이곳에서는 외솔 뜻을 이어받아 그렇게 문고판 전집을 냈지만 <문익환 전집>도 <예용해 전집>도 <이철용 전집>도 <박경리 전집>도... 하나같이 `전집'을 다 사려면 십만 원이 훨씬 넘는 돈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은 또 어떻습니까.

시 "그 날이 오면"을 읽으면 "그 날이 오면...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라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 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하고 목놓아 부르짖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마음입니다. 우리가 좋은 책을 부담없이 사 읽고 나눌 수 있는 책 문화 환경을 갖고 죽자사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고박고 다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또한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책을 보면서

<정은서점>을 둘러보면, <친일파> <오래된 미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고인돌 3> <살아 있는 그림 그리기> 같은 요즘도 꾸준히 팔리는 책이나 절판된 책부터 구비문학대계> <황금찬 시모음> 1940년대 교과서, 북한에서 펴낸 말글 연구서 영인본까지도 찾아볼 수 있지요.

책을 보면서 무얼 얻고 무얼 사회에서 나눌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앞서 저부터 `느림'을 올곧게 헤아리고 곰삭여 늘 즐겁고 조촐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연대 앞 정은서점] 02) 323-3085


* <정은서점> 언저리(연대 앞)에 서는 버스들 *

일반버스 : 5-1, 41, 8, 70, 73, 130, 135, 142-1, 141, 142, 143, 133-2, 205, 205-2, 588-1, 588-2, 542, 543, 328

좌석-공항버스 : 68, 12, 130, 773, 800, 903, 903-1, 1000, 567, 61-2, 62, 77-2, 77-3, 915, 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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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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