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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준비할 때 책 사는 대학생

보름만에 <신고서점>을 찾아갔습니다. 문 앞에 쌓인 책더미는 줄이고 줄여도 금세 책이 늘어나 다시 초등학생 키만큼 다시 쌓입니다. 아저씨에게 인사하고 새로 들어온 책들을 훑어 <김응모-한국어 운동경기 동사 낱말밭, 박이정(1997)>을 건집니다. 이런저런 책을 더 훑고 있는 사이 가까이 외국어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 셋이 들어와 이러저러한 교재를 찾습니다.

아저씨는 그게 있나 하고 안쪽에 있는 대학교재 책장 앞에 섭니다. 안경을 살짝 올리며 높은 곳까지 살펴서 한 권을 찾습니다. 나중에 한 권을 더 찾았습니다. 교재가 무척 비싼 녀석이었는지 한 권에 만 원이랍니다.

대학생은 곧 시험 본다며, 나중에 와서 팔면 얼마 받으시냐고 묻습니다. "책을 사기도 전에 팔 생각을 하면 어떡해"하며 "그럼 내가 얼마 받겠다고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아저씨가 얘기합니다. "시험만 보면 쓸모가 없다"는 대학생은 가진 돈이 9000원밖에 없어서 죄송하다며, 9000원을 내고 한 사람만 교재를 사갔습니다.

교재 하나 사면서 너무 큰 목소리로 얘기했기에 신경이 쓰여서 아저씨와 대학생이 하는 얘기를 다 듣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는 이제 학기끝 시험을 볼 철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수업을 참 많이 들었을 텐데 교재를 이제 와서 헌책방에서 산다니.

교재야 어디서건 살 수 있지만 시험을 앞두고 산다는 일은 참 께름칙합니다. 교재는 `시험 목적'으로 사서 보는 책이 아니니까요. 자신이 배우는 밭(분야) 학문을 제대로 갈고 닦고자 옆에 두고 익히는 책이지요. 교재 하나도 제대로 챙겨서 보지 않는 우리 대학생들이 자기 삶과 이웃 삶을 밝히고 이끌 책을 볼지 안볼지는 눈에 선하네요. 안타깝게도.

석관동에서 청계천까지

아저씨는 책사러 가시고 아주머니가 책방 단속하러 나오셨습니다. 아주머니는 어느 할아버지와 퍽 오래 얘기를 나누셨는데 할아버지가 나가신 뒤 `저 할아버지가 경복고 교사를 하다가 정년퇴임하신 분'이라며, 석관동짬에 사시는 듯한데 날마다 청계천까지 걸어서 오가면서 성경도 사고 이런 저런 책들을 사신답니다. 그렇게 석관동에서 청계천을 걸어다니며 가끔 <신고>에도 들르고요. 차를 안 타면서 걷는 일이 건강에도 좋다고 하신답니다.

할아버지는 <토지>를 읽는데 처음 몇 권이 나와서 사서 읽었는데 나중에 다시 열몇 권이 나와 다시 읽었더랍니다. 그런데 다시 또 나오고 그랬다며, "책을 읽는데 우리말을 살려서 썼다는 책이지만 통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토속어를 살려서 소설을 쓰는 게 좋다고는 하지만..."하고 끝을 살짝 얼버무립니다.

<토지>가 여러 출판사를 거치며 판이 바뀌었으니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이들로선 새로 나온 책을 다시 읽는 짐을 안기도 하겠더군요. 더불어 <토지>가 토속말을 살려서 쓴 좋은 소설이란 소리를 듣지만 그 토속말이 `산 말'이 아니고 `죽은 말'을 말멋을 부려서 썼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가 널리 쓰는 말로 산뜻한 말 씀씀이를 부릴 수도 있고 낱말책을 뒤적여서 쓸 수 있고 글쟁이(작가) 머리로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소설가들이 뜻을 모르고 쓴 말을 꼼꼼히 꼬집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니 소설가들이 발끈해서 `문학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고 쌍심지를 세우더군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책 읽는 이들이 솔솔 책 속 이야기를 잘 헤아리며 읽을 수 있게 하는 일이 글쟁이들 일이 아니겠습니까. 느낌에 따라 말뜻에 따라 거의 안 쓰는 말을 담기도 하고 머리를 궁글려 말을 짓기도 할 수 있지만 이 말들을 읽는 독자쪽에서는 참으로 어렵고 낯선 일이 될 수 있지요.


2분간의 녹색운동

안쪽 책방으로 들어가 이란 책을 하나 봅니다. "지구 환경을 살릴 수 있는 일 가운데 우리가 선뜻 나서서 할 만한 일은 없어 보이지만 2분만 들이면 얼마든지 환경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거의 모두는 바로 이 `2분'조차 들이지 않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곱씹으면 `2분'만이 아니라 `20분' `두 시간'을 펑펑 쓰거나 뜻없이 쓰기도 하면서 정작 우리뿐 아니라 우리 뒷세대까지 헤아리는 `환경 걱정'에 쓰는데는 `2분'조차 쓰지 못합니다.

석관동 할아버지는 청계천까지 걸어다닌다고 했지요. 저도 그 얘길 듣고 처음엔 어이쿠 놀랍구나 했지요. 그건 `그만한 거리면 으레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진짜 스무 해 앞서만 해도 그만한 거리는 버스 타기가 아까와 걸어다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다고 그저 우린 한 정류장 걷는데도 투덜투덜거리죠-저도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분 걷고 2분 걷고 5분 걷는 일은 "무한경쟁시대인 21세기에는 낭비"라는 믿음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지 않은가요? 우리가 버스 정류장으로 두세 정류장이 되는 거리는 걸어다니면 몸에도 좋고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는 얘기는 퍽 오래 전부터 해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지요. `마을버스 타고 백화점 셔틀버스 타지 왜 걸어다니냐'고 합니다. `택시 타면 기본요금이야' 하지만 `걸어가면 10분이야' 하는 얘기는 안 합니다.

10분 아낀다는 생각을 나 하나만 하면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분 아낀다는 생각과 10분 몸 편하자는 생각을 다들 하니까 자동차를 뽑아서 굴립니다. 그 탓에 거리는 늘 자동차가 꽉꽉 들어차고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로 우리 삶터 공기는 나날이 `최악'을 거듭납니다. 새삼스레 석관동 할아버지가 우러러보입니다.

반가운 임길택 선생님 책

임길택 선생님은 1997년 1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15일 무렵이었나? 대통령선거를 며칠 앞두고 암으로 돌아가셨죠. 그래서 한때 "임 선생님은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안타깝다"며 언저리 사람들이 무던히도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세상이 바뀌긴 개뿔이지. 이런 꼬락서니 안 보고 돌아가셨으니 다행이다"고 얘기합니다.

지난 1990년에 나왔던 <우리 동네 아이들> 고침판이 <산골 마을 아이들(1998)>이더군요. 이 책을 사기 앞서까진 둘이 다른 책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998년에 고침판을 내며 사잇그림(삽화)도 모두 다시 그렸네요. 두 가지 빛으로 다시 그린 사잇그림도 참 곱네요. 더불어 이 땅 아이들 마음을 믿고 아이들에게 아름다움을 배우고 나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깨닫고 아이들에게 한 줌 보탬이라도 되고자 써 남긴 이야기(동화)들이 오래오래 빛밝히며 이어가는 모습을 보아서 더 반가왔습니다.

임길택 선생님이 남긴 책으로는 <탄광마을 아이들, 실천문학사> <할아버지 요강, 보리> <느릅골 아이들, 산하> <탄광마을에 뜨는 달, 다솜> <하늘 숨을 쉬는 아이들, 종로서적>이 있습니다. 임길택 선생님이 남긴 책들 가운데 절판이 될 뻔한 책도 있었지만 모두 새책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절판된 책이 없다 함은 그만큼 꾸준히 찾는 사람이 많고 그만큼 값진 책임을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새로 파고 알아가는 이야기

<홍선희-조소앙의 삼균주의 연구, 한길사(1982)>란 자그마한 책을 한 권 골랐습니다. 하지만 `조소앙'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릅니다. 지금껏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역사책에서 잠깐 이름만 들었다 뿐이지 무얼 한 사람인지 배우지 못했으니까요. `삼균주의'란 말만 얼핏 들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이승만 같은 이들이나 널리 알려지고 `조소앙' 같은 이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백범 공원은 그나마 남산에 있어서 사람들이 잘 안다지만 몽양 여운형 스승이나 죽산 조봉암 스승 같은 이와 더불어 조소앙 같은 이들은 동상이나 세워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됨됨이와 한 일을 따지고 헤아려 기념관을 짓고 세우지 않으며 정치목적으로 뒤틀린 박정희 기념관을 짓겠다는 우리 정부와 우리 사회환경 탓이 크지요. 더불어 교육과정 안에서도 참된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과서 틀 탓도 크고요.

그러나 헌책방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는 책을 마음껏 살 수 있습니다. 저는 헌책방에 와서 성내운 교수-돌아가심-를 알았고 윤구병이란 사람도 알고 김익달, 한창기 같은 이들도 알았습니다. 외솔 최현배 스승도 말만 가끔 들었을 뿐이지만 헌책방에 와서 손수 그 사람이 쓴 책을 사서 보고나서야 어떤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정치권력'안에 또아리를 튼 이희승 같은 이들은 교과서에도 자기 글을 올렸고 식민지 때부터 독재를 거치는 동안 기생오라비처럼 알랑방구 뀐 서정주 같은 이들 시도 교과서에는 올라가 있지요. 문학성과 문화성, 사회성, 역사성 보다 `정치권력'이 맨앞에 있었으니까요.

헌책방에서는 어느 누구도 푸대접하지 않습니다. 다만 떠받들어 우러르는 사람들은 가끔 있습니다. 신영복 씨는 <엽서>란 책으로 떠받듬을 받지요. 최민식, 김기찬 씨는 저마다 <인간>과 <골목 안 풍경>이란 사진책으로 떠받듬을 받고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생존자임에도 김대중 대통령 책이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책은 거의 사람들 눈길을 잡아끌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같은 사람들 책은 `짐덩이'로 여깁니다. 박은식 스승 <한국통사> 같은 책은 자그마한 문고판이 들어와도 귀하게 여기지만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김대중 대통령 책은 대통령이니까 말은 안 할 뿐 푸대접 신셉니다.

기다림과 꾸준함

헌책방 소식지를 복사하러 외대 앞 단골 복사집에 와서 한두 시간 남짓 일하다 보면 "아줌마 이거 복사 좀 빨리 해 주세요. 급해요!" 하고 닦달하는 젊은 아가씨들을 자주 봅니다. 분명히 서둘러야 할 때는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얼마쯤 걸리리라 내다보고 하나씩 꾸준히 준비한다면 살아가며 서두를 일은 썩 많지 않습니다. 하루 늦게 일을 마칠 수 있습니다. 십 분 늦게 갈 수 있지요. 한 시간 더 걸려 일을 마칠 수 있습니다. 공부도 한 해 더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자기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는 생각하고 헤아려야겠습니다.

좀더 올곧고 튼실한 자기 자신을 바란다면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곧은 믿음과 끈기로 일하고 살았던 사람들을 찾게 마련이고, 자연스레 그런 사람들 생각과 삶을 알아보고자 책을 찾습니다. 그래서 헌책방에 발길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차근차근 생각하고, 너무 서두르면서 다른 사람을 닦달해 덩달아 서두르게 하지 않는다면 헌책방에 가서 임길택, 조소앙 같은 사람도 알아갈 수 있습니다. 뭐 이런 사람들 이름조차 모른다고 해서 밥굶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쁘게 살면서 왜 바쁘게 사는지" 못 깨달을 수 있죠.

[외대 앞 신고서점] 02) 960-6423 / 016-236-6423
http://myhome.netsgo.com/bubdha

덧붙이는 글 | * <신고서점>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앞을 지나가는 버스 134,6-1,38,38-2,48번이 있고 지하철 1호선(국철) 외대앞역에서 내려 외대 정문까지 걸어온 뒤 오른편 석관동(드림랜드)쪽으로 걸어가서 구름다리(육교) 아래에 있습니다 *

* http://pen.nownuri.net 과 freechal.com/booklover 에서도 헌책방 이야기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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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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