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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보길도를 떠난 나의 여정은 늦은 오후의 지리산 자락 산사에 가 멈춥니다.
그리운 벗들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벗들보다 먼저 저녁이 옵니다.
나를 외딴 섬으로부터 육지의 깊은 산 속까지 오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을 대전으로부터, 서울로부터, 대구로부터, 진주로부터, 제주도로부터 이 오래된 산사로 불러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천왕봉의 달빛이었을까요, 백무동의 물안개였을까요. 실상사 범종 소리였을까요. 굽이굽이 살점 찢기우고 허리 잘려나간 상처마다 덧나, 고통 깊어가는 지리산의 신음 소리였을까요.

구산선문 최초 가람 '실상사', 나는 이 가난하고 아름다운 절 마당에 엎드려 하염없는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지리산의 물봉선과 실상사의 세스님(연관, 수경, 도법)에게 '풀꽃상'을 드리기 위해서울에서 출발한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http://www.fulssi.or.kr)의 벗들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합니다.

전국에서 모인 100여명의 '풀씨'들, 오늘밤 풀씨들은 연등이 걸린 석탑을 돌며, 한없이 가난한 절, 실상사의 참된 비구(이 범어의 본뜻인 乞士, 걸인)들로부터 가난하게 사는 행복에 대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실상사의 밤이 깊어 갑니다.
새벽 여섯시, 풀씨들은 공양간에서 정성스럽게 마련한 아침 공양을 들고 이 시대의 참 스승 도법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습니다.

도법 스님은 이미 '화엄의 길 생명의 길'(선우도량)을 통해 인간들이 "자신의 고향인 자연을 파괴하고 같은 동류인 생명을 해치며, 인간끼리도 이기적인 욕구를 위해선 서슴없이 배신하고 무참히 짓밟아 놓고서도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인간들은 우주와 산하대지 그리고 그 가운데 날고 뛰고 기어 다니는 만류들이 온통 끝없이 넓고 큰 한덩어리 생명의 바다 평등한 동체의 생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한 바 있습니다.

오늘 법문을 통해서도 스님은 산과 나무와 물봉선과 인간이 한 뿌리임을 통절히 설파합니다.
이제 곧 실상사 마당에서 풀꽃상 시상식이 열립니다.
자연에 대한 존경심의 회복을 위해 이미 동강의 비오리와 보길도의 갯돌과 민둥산의 억새, 인사동의 골목길과 새만금의 백합 등 자연물에게 상을 드린 바 있는 풀꽃세상이 이번에는 지리산 댐 건설로 수장될 위기에 처한 지리산의 물봉선에게 여섯번째 풀꽃상을 드립니다.

이 상의 의미는 강의 기능을 상실한 채 이미 거대한 하수구로 변한 낙동강의 생태계를 살릴 계획이나 깊은 고민 없이 산과 강을 죽이는 댐 건설을 통해 식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려는 수자원공사의 근시안적인 정책을 반대하고 댐 건설로 파괴될 위기에 처한 지리산 생태계를 살리는데 작지만 강력한 힘을 보태자는데 있지요.

미국의 경우 지난 20여년간 200개가 넘는 댐들을 해체했고, 스웨덴도 1988년 댐 건설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극히 제한된 지역을 빼고는 댐 건설을 전면 중단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댐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무 대안 없는 반대는 아닙니다.

작년 한해 서울 시내 수도관을 통해 누수된 물만도 6억4400만톤이나 되고 경남 마산시의 경우 누수율이 46%에 이른다고 하니 이렇게 새어나가는 수자원을 잘 관리하는 것이 2억톤 규모의 내린천댐과 6억톤 규모의 영월댐을 새로 건설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환경도 살리는 물 대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리산댐도 다르지 않습니다.

햇볕 따사로운 가을날 오전 한 때, 절 마당 어귀 감나무 아래, 풀꽃상에서 드린 그림 액자 하나만을 유일한 부상품으로 받으신 수경스님은 댐 건설이 왜 잘못된 일인가를 '산은 푸르러야 하고 물은 흘러야 한다'는 단 한마디로 명쾌하게 일갈합니다.

상을 드리는 자리에 이미 저버린 물봉선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즉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물봉선의 꽃말을 듣습니다.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touch-me-not) 돌아 보건대 인간이 '건드려' 더 좋아진 곳이 이 땅 어느 한곳인들 있었던가요.

시상식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봉선에게 상을 주지 않았습니다. 물봉선 또한 상을 받은 바 없습니다.
단지 시상식은 물봉선과 우리가 서로 한 뿌리임을 확인하는 의식에 다름 아니었을 뿐이지요.
시간은 겨우 정오를 지나고 있는데 나는 또 막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먼 길을 떠나야 합니다.

수경 스님께 합장하고, 풀꽃상을 통해 작지만 소중한 실천을 함께 한 풀씨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나는 사티쉬 쿠마르가 강조한 작은 실천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단 하나의 촛불이라도 켜는 게 낫다. 건설적인 계획 하나를 시작하는 게 세상이 얼마나 나쁜지 끝없이 말하고 있는 것 보다 낫다'.

덧붙이는 글 |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
- 지리산 물봉선에게 드린 여섯번째 풀꽃상 

"우리는 이 세상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부드러운 풀꽃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 물봉선사진은 호남농업시험장(http://www.nhaes.go.kr)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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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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