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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 가면서 분주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세연정으로 난 오솔길의 풀들을 베어냅니다.
한 동안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싶었는지 길은 어느새 풀밭으로 변해 있습니다.

지난 봄 처음 동천다려에서 세연정 사이 숲속에 길 하나 만들어 놓고서 나는 고산의 정원을 내 정원으로 만들어 버렸노라고 기뻐했었지요.
매일 아침 이 길을 지나 세연정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고, 옥소대를 오르며 맑은 공기를 호흡했습니다.
이유 없이 여러 날을 길 위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굳이 이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길을 가지 않게 됐지요.
간혹 차를 마시기 위해서나 세연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이 길을 따라 동천다려까지 찾아 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을 들면서부터는 이들의 발길마저 뜸해져 갔습니다.

그 사이 길에는 온갖 잡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칡넝쿨이며 까상쿠들이 뒤엉켜 더 이상 사람이 다닐 수 없게 돼 버렸습니다.
사람 자취 끊어지면서부터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아침 다시 풀들을 베어내고 넝쿨을 걷어내며 길을 만듭니다.
새로 난 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나 다시 세연정을 얻었다고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길은 이해의 관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뿐만이 아니겠지요. 사람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어떠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든 사심이 끼어들면 그 관계는 곧 황폐해 지고 맙니다.
오늘 아침 문득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한 관계,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그립습니다.

세연정으로 통하는 오솔길의 풀들을 베어내고 난 뒤 나는 집 아래 텃밭으로 향합니다.
햇볕 들기 전에 배추 모종을 해야 합니다.
진작에 씨앗을 뿌렸어야 될 것을 게으름 피우다 때를 놓치고 이웃의 배추밭에서 솎아 온 배추를 옮겨 심습니다.

작년 겨울 노지에서 월동하는 배추를 처음 뜯어다 먹었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달고 고소한 맛은 온상재배 채소의 심심하고 밋밋한 맛 때문에 생야채를 즐겨하지 않던 내 입맛을 바꿔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이곳은 겨울이 따뜻하여 겨우내 배추뿐만 아니라 상추, 치커리 등 많은 채소의 노지 재배가 가능합니다.
눈내리는 보길도의 겨울 들판, 눈속에 파묻혀 있어도 여전히 푸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싱싱한 야채들.
겨울에 누리게 될 수확의 기쁨이 생각만으로도 마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오늘 아침 그대를 위해 배추 한포기 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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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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