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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꼼꼼히 따지자면 `노고산동'에 자리한 <숨어있는 책>은 많은 사람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헌책방입니다. 먼저 `책을 많이 안다'고 하는 출판사 경력을 지닌 사람이 `뜻이 있어서' 출판사 그만두고 문을 연 까닭도 있지만 자그마한 책방을 시내에서 주택가 안쪽으로 들어간 외진 자리에 터를 잡고 돈 되는 참고서와 잡지 장사를 전혀 하지 않는 대목에서 많이 눈여겨 볼 만합니다.

더불어 쉽게 돈을 쥘 수 있는 `고서 장사'도 하지 않고 도매상 구실보다 소매상으로서 책을 `골라서 갖추고 찾아보기 좋도록' 깔끔하고 깨끗하게 관리한다는 대목에서 헌책방 순례자나 많은 책손님들이 즐겨 찾고 장사가 잘 되는가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지요.

이러한 눈길(관심)이 저으기 짐스러울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아무리 뜻이 있다 해도 장사꾼은 장사꾼이니까요. 먹고 살지 못하고 빚만 진다면 뜻이 아무리 좋아도 장사를 할 수 없잖습니까. 그런 까닭에선지 <숨어있는 책>의 노동환 형은 `알맞은(적당한) 값에 책을 사서 알맞은 값에 판다'는 걸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지난 해(1999년) 11월 끝무렵에 문을 열었으니 머지 않아 한 해가 됩니다. 처음 한 달이 중요하고 다음 세 달, 그리고 또 여섯 달째, 그 다음에 한 해가 중요하고 이태가 중요하고 세 해, 다섯 해가 되면 열 해까지는 어지간히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헌책 장사도 때와 날씨 따위를 무척 많이 타서 어느 날은 그야말로 파리만 날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사람이 복작대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런저런 어려움과 파리날림과 복작거림을 온몸으로 부대끼고 느긋함도 조금은 가진 채 웬만큼 살림을 꾸준히 이을 수 있으려면 여러 해를 꾸려가야 안다고 합니다. 이제 그 여러 해로 나아가는 길목 가운데 `한 해'라는 고비
앞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구십년대 들어서 문을 연 헌책방치고 처음 한두 해 동안 적자 안 본 헌책방이 없을 만큼 구십년대, 이천년대 헌책방 경기란 거적 쓰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책을 안 보고 그 가운데 `헌책'이란 녀석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눈길이 얕은 현실에서도 이러한 절망 같은 구렁텅이를 조금이라도 고쳐 보거나 책 문화에 콩알만큼이라도 이바지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겨우 버틸 수 있지요.

용산 <뿌리서점> 아저씨는 늘 `민족과 통일'을 이야기하고 책손님과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헌책방 살림과 고단한 하루 일과를 너털웃음으로 이겨냅니다. <숨어있는 책>도 이곳을 찾는 여러 책손님들과 그네들이 요즘 하는 일은 잘 되는지 이야기하고 이런저런 책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고개숙여 모르는 수많은 책나라 이야기를 배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가위를 맞이해 사랑이(애인) 어머니 되는 분에게 책을 한 권 선사하려고 지난 번에 찾아왔을 때 사두고 가져가지 않은 책을 찾으러 왔죠. 사랑이 어머니는 책보다 `꽃'을 사 주기를 바라니 앞으론 꽃분을 사서 선사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무늬>란 책은 조각보 공부와 조각보 뜨개질을 부지런히 하는 요즈음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미리 사두었죠.

어슬렁어슬렁 조그마한 책방 복판에 놓인 책장을 사이에 두고 빙빙 돌며 <숨어있는 책> 형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몇 가지 책을 골랐습니다. 우리 말 낱말책(국어사전) 만드는 공부하는 데 쓸 <왕문용 - 여자의 말, 남자의 말, 그리고 의사소통, 강원대출판부(2000)>를 고르고 <중국의 얼굴, 열화당1995)>이라는 19세기 중국 사람들과 중국 생활상을 담은 사진책을 집어듭니다. <중국의 얼굴>을 언제 번역했는지 판권을 보니 "열화당이 세기말에 드리는 대잔치"라는 붉은 도장과 함께 책값을 50%에 드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의 얼굴>은 1995년에 책값 5000원을 달고 나왔는데 책이 무던히도 안 팔린 모양입니다. 그 탓에 다섯 해 뒤인 2000년에 2500원에 팔죠.

제4회 한겨레문학상을 탄 <김곰치-엄마와 함께 칼국수를(1999)>도 있군요. 처음 책이 나왔을 때 사서 본다는 게 때를 놓치는 바람에 잊고 지냈는데 헌책방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백기완 선생이 1991년에 펴낸 <이심이 이야기, 민족통일>라는 옛이야기 책도 있네요. 판권을 보니 두어 달만에 삼쇄를 찍었을 만큼 꽤 팔려나간 듯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엔 백기완 선생이 어느 교수님에게 선물로 드린 흔적이 남아 있어서 씁쓸합니다. 그 교수님이 정년퇴직하면서 연구실에 있던 책들 사이에서 잘못해서 흘러나왔을까요? 책에 묻은 손때와 책이 접혀있는 여러 흔적들로 보아 이 책을 선사받은 분은 퍽 알뜰하게 이 책을 읽은 듯합니다. 어쩌면 "좋은 책이니 다른 이들도 보라고" 책을 내놓았는지 모르죠.

인천 <아벨서점> 단골인 최원식 교수는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이 그 달에 본 잡지를 헌책방에 내놓는답니다. 자기는 잡지는 나온 달에 다 보면 되기에 그 잡지들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내놓는 편이 낫겠다고 보고 그밖에 여기저기서 얻은 책 가운데 자신에게 그다지 쓸모가 없거나 이미 자기에겐 쓸모가 없어진 책들, 여분으로 얻은 책은 헌책방에 내놓는다고 하더군요.

헌책방은 바로 이렇게 갓 나온 새책이라도 `이 책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갔어야 할 책인데' 하고 생각하며 내놓을 수 있는 곳입니다. 살다 보면 책 선물도 받고 우연찮게 얻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꼭 자기가 바라는 책을 선사받거나 얻지는 않지요. 이럴 때는 선사한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 아니 오히려 미안한 일이라기보다 참말로 쓸모 있는 사람에게 책이 가는 일이니 훨씬 바람직하고 반가운 일일 수 있죠 - 헌책방에 책을 파는 일이 좋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올해 들어서 헌책방에 책을 오백 권 넘게 팔았답니다.

이렇게 책을 고르는 동안 밖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끊임없이 내립니다. 비 오는 날은 헌책방들이 거의 공치는 날이었죠. 요즘은 <숨어있는 책>이나 언저리 <공씨책방> <정은서점>처럼 책을 밖에 얼마 내놓지 않거나 안 내놓고 가게 안에 책장을 크게 놓고 그 안에 다 꽂아놓거나 가게 안에 책을 쌓아두어서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언제나 똑같이 책을 볼 수 있는 헌책방이 늘어갑니다. 거의 모든 헌책방이 이렇게 달라져가고 있죠. 그래서 <숨어있는 책>도 비가 오는 날이라도 거리낌없이 찾아오기 좋습니다.

비 오는 날은 그리운 님,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지만, 만날 사람이 없고 집에서 호젓하게 내리는 비만 `비바라기'하고 있다면 한 번 길을 나서 보면 어떨까 합니다. `비 오는 날 헌책방에 가서 책을 보다'. 이것도 퍽 재미난 `일상탈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 오는 날 <숨어있는 책>에 가서 주인장 형과 누나와 이야기꽃을 피워 보는 일도 참 괜찮습니다.

덧붙이는 글 | <신촌 숨어있는책> 02) 333-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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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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