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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철 용산역에서 광장쪽으로 나오면 탁 트인 자리가 시원하게 눈 안에 들어옵니다. 제가 사는 외대 앞에서는 38번 버스를 타면 곧바로 오기도 하지만 <뿌리>에 갈 때면 늘 전철을 타고 갑니다. 전철 용산역에서 내려 광장을 바라보며 크게 숨 한 번 모아쉬고 넓고 사람 드문 길을 가로질러가는 맛이 괜찮거든요.

컨벤션센터가 있는 건물은 얼마 앞서까지 `양지학원'이 있던 곳입니다. 용산에는 대입준비 학원이 세 군데나 있었지만 바로 옆에 `등붉은거리(홍등가)'가 자리한 탓에 하나둘 이곳을 떠나갔습니다. 학부모들이 학원 바로 옆에 자리한 `등붉은거리'를 보고 질색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노량진으로 가든 다른 곳으로 떠나갔으니까요.

입시학원이라 해도 헌책방 가까이에 `교육 시설'이 있다는 사실은 적잖이 도움을 줍니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피와 살이 되는 책은 사 주지 못해도 시험점수 잘 따도록 공부시키는 자습서와 문제집은 돈을 어떻게든 긁어내서라도 사 주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나날이 책을 안 읽어가는 흐름 속에서 헌책방은 이렇게 학원이라도 한 군데 기대며 자습서와 문제집 따위를 팔며 살림을 꾸리기도 해야 할 판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이죠.

<뿌리서점>엔 14일에 찾아갔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지만 <헌책사랑>이라는 헌책방 소식지 10호를 다 엮은 뒤 이 녀석을 스물다섯 부 들고 용산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사실 비 오는 날 용산 <뿌리서점>에 가면 책을 고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뿌리서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닥다리 헌책방'이라서 주인 아저씨가 책방 안을 가득 채운 책을 길거리에 꺼내놓아야 책방 안에 쌓인 책을 구경할 수 있거든요.

청계천 거리에 있는 헌책방에 아침에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곳에 있는 헌책방들 아침 일과는 가게를 가득 메운 책을 길가에 꺼내서 늘어놓는 일입니다. <뿌리서점>은 낮 두 시 즈음 문을 여는데 이때부터 저녁에 해가 기웃기웃할 때까지 책방 안에 있는 책더미들을 밖으로 내놓습니다. 물론 책방 안에 쌓아둔 책을 밖으로 모두 끄집어낸 적은 요 몇 해 사이에 아직 한 번도 없었죠(그만큼 책이 많이 쌓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올 여름엔 비가 구질구질 자주 오고 지짐지짐 쏟아지기까지 해서 곤혹스러웠던 때도 많을 뿐더러 그 탓에 매상도 많이 떨어져 걱정이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을 책방 안에 쌓아두기만 하고 따로 갈무리(정리)할 짬을 내지 못해 어려워 했습니다. 이번 한가위와 연휴 때 천안에 내려가지 않은 김에 책방 갈무리 좀 일매지게 해보려 했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할까요. 어제도 그제도 태풍 탓에 비가 그치지 않으니 책방 갈무리는 커녕 문조차 열 수 없었답니다. 모처럼 달콤하게 쉬는날을 맞이한 셈이지만 책 갈무리를 하나도 하지 못해서 아저씨와 아주머니 모두 속이 아주 답답하답니다.

어쩔 길이 있나요. 하늘 뜻은 태풍을 우리 나라 안쪽으로 끌여들어 비를 꾸루루룩 내리는 뜻이니까요. 그저 태풍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랍니다.

이렇게 책더미가 가득 쌓여서 위태롭고 숨이 턱턱 막히지만 빗길을 뚫고 먼 길을 자가용을 몰고 책을 보러 찾아오신 분도 있네요. 비 오는 날은 <뿌리>에서 책 보기가 힘든 줄 알면서도 이미 오랜동안 <뿌리>에 와 보았던 분들은 오히려 책손님이 적은 `비 오는 날'을 골라서 책을 보러 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분은 십만 원 어치도 넘는 책을 골라놓고 있더군요. 글쎄. 비 오는 날은 <뿌리>가 매상이 뚝 떨어지는데 아저씨와 아줌마 답답한 속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한 몫 단단히 잡아주는 책손님이 찾아왔을까요?

저도 안쪽 책방에선 책을 고르지 못하고 <뿌리> 아저씨 아줌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해가리개 아래에 끈으로 묶어둔 낡은 책더미를 문득 보았습니다. `지난 번에는 못 봤다' 싶은 책이라 끈을 푸르고 하나씩 더듬어 보니 낱말책 만들 자료로 쓸 좋은 책들이 여럿 눈에 띕니다.

4289(1956)년에 나온 <최신 콘사이스 국한사전,삼문사>란 손바닥만한 사전이 먼저 잡혔고 1955년에 나온 <불한-불영사전>도 손에 잡힙니다. 4288(1955)년에 나온 <새 도이취-말 교본>도 있고 <경제용어해설집(1960)>과 <정 인승-한글강화,신구문화사(1960)> 같은 책도 찾았습니다. 고등학교 문학자습서와 같은 <국어 학습사전,동아출판사(1958)> 같은 소중한 옛 참고서도 눈에 띄었습니다. 으레 1959년 앞서 나온 책들을 고서라 하니 이 책들은 모두 고서에 들어가는 소중한 책입니다. 하지만 끊이지 않는 비 탓에 몇몇 책은 곰팡이가 슬고 사람들이 책을 알아보지 못하여 몇몇 책은 그냥 썩고 있더군요.

선우휘 선생이 1972년에 일지사에서 펴낸 창작소설모음 <망향>도 있었는데 선우휘 선생이 자신 삶을 그다지 아름답게 끝맺지 못한 탓인지 책값을 퍽 싸게 매겨서 샀습니다. 만화책을 뒤지다 대사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공룡 만화인 <곤(GON)>도 한 권 건졌습니다. 대사를 달지 않아도 얼마든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고 그림으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고 자연과 사람이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는 좋은 만화지요.

그러나 저러나 어떡합니까. 비는 어제도 오늘도 그치지 않고 내일도 내내 올 듯합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적어도 태풍이 우리 나라에서 열두 시간 동안은 비를 뿌린다고 하는데 모레쯤이면 물러날까요? 그래서 <뿌리> 아저씨가 생각하는 대로 책방 갈무리를 멋들어지게 해내면서 사람들이 <뿌리>에 와서 책을 좀 더 잘 찾아볼 수 있게 되고 책더미가 끝없이 쌓여서 책탑이 되어 천장까지 가닿는 모습을 안 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날씨가 도와 주면 이 일들은 술술 풀릴 듯한데. 먹구름은 하늘에도 깔려 있지만 우리 문화에도 깔려 있고 바로 이 헌책방들 위에도 깔려 있습니다. 책 문화 위에도 먹구름이 깔려 있는 우리나라입니다. 그 먹구름들이 물러나면 우리 문화, 헌책방, 책 문화에도 밝고 따사로운 햇빛이 비칠는지. 햇빛도 비치고 <뿌리>를 찾아가는 사람마다 좋은 책을 한두 권씩은 쥐고 나오며 자기 삶을 아름답게 북돋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용산 뿌리서점] 02) 797-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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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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