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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미국에 와서도 꼬박 이틀이나 걸리네. 미국 사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기까지.

하루는 잠을 자고 짐을 풀고 옷가지를 정리하고 둘째 날은 사람이 살지 않아도 먼지가 쌓이는 집안을 털어 내고, 꽉 차다 못해 넘쳐 있는 우편함을 정리하고 여기서 벌지 않고 또 살지 않았는데도 쌓여있는 빌(bill)을 보내고 그리고 또, 전자우편함으로 들어오는 메일과 뉴스 몇 가지를 확인하고 그리고 답신을 보내고. 때맞추어 여기 저기서 걸려오는 안부전화를 받고.

하루 반을 꼼짝도 하기 싫어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과 짜파게티, 김과 냉장고에 시어빠진 채 남아 있는 물김치,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겨우 머쉬룸 수프와 핫케익을 만들며 밤참까지 총 여섯 끼를 해결했어.

사랑과 정성을 듬뿍 쏟아 음식을 만들지도 못하면서 인스턴트 식품을 끔찍히도 싫어해 여간해서 라면을 안 사고 안 먹는 나는 수출용과는 맛과 성분이 다르다는(수출용 라면에는 특히 방부제가 많이 섞여 있대) 한국라면을 꼭 사다달라는 남편친구의 청을 거절 못하고 시아버지의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라면박스를 여기까지 싸들고 왔거든. 이틀동안 그 덕을 톡톡히 본 셈이지.

이제야 나가서 잔뜩 장을 봐다가 냉장고를 채우고 김치를 해서 두 병에 채워놓고는 "아이고 힘들어" 끙끙거리고 앉아서 이걸 또 시작한다.

처음부터 썩 내키는 한국길은 아니었다. 그것은 결혼하고 십 년 넘게 흘렀어도 이제껏 한번도 들려준 적 없으신 시어머님의 노한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어. 그 너머에 있는 것. 체면과 분위기 문화. 그런 것에 또 나를 맞춰야 한다는 것이 십 년 동안 불효한 내 모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기껍지 않았다.

"남들은 미국 간 지 십 년이면 다들 한 번씩은 다녀가던데 너희는 왜 한번 못 나오니.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니? 아니 거기서 얼마나 못살면 그래 한 번도 못 오냐고 그런다."

아이들 방학도 안 했는데 막내 딸 결혼식에 맞추어 하루를 있다 가더라도 무조건 온 식구가 함께 나왔다 들어가라고 성화를 하셨다. 결혼식에 모일 그 '다른 사람들'에게 얼굴 한번씩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얼마나 쑤셔놓았으면 우리 어머님께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실까.

"어머니, 저 그렇게는 못합니다. 어머니 말씀처럼 십 년만에 정말 어렵게 가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얼굴 보여 주려고 가야 합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어머님 아버님이 더 중요하고 우리 아이들, 그 동안 못 받았던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 알고, 그리고 사촌들이랑 정 붙이고 오게 하고 싶습니다. 점점 잃어 가는 한국말도 꼭 이번 기회에 되찾아오게 하구 싶구요."

그래서 아이들 방학하자마자 서둘러 떠났다. 아이들 고모 결혼식 날짜는 놓쳤지만 대신 시어머님 회갑 모임을 우리가 그곳에 있는 동안 하기로 하고.

"부담 많이 되겠지만 이왕 오는 건데 편안하게 생각하고 왔다 가요. 와서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들 거예요. 내가 부모님 곁에 있어 드려야 할 시간에 그러지 못했다는 것 느끼게 될 거예요. 내가 그랬거든요. 그 동안 주름만 느신 어머니를 마주하고 나니 왜 그렇게 서럽던지..."
8년 아틀란타 외지 생활을 마치고 1년 전에 서울로 기어이 돌아간 친구가 이메일로 보내준 말을 새기고 비행기를 탔다.

그래, 그 동안 곁에 못 있어 드린 것, 그 시간들을 모두 끌어다 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들과 함께 흘려 보내지 못하고 가슴 속에 쌓아놓은 것들 그거라도 들어드리고 오자. 할 수 있는 한 많이.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갔는데 생각만큼 많이 그러지는 못했다.

직장에 갈 때는 물론, 한 길 앞 수퍼마켓을 가도 이웃집에 들르거나 놀이터에 나가도 늘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여기 생활에(미국은 13살 미만의 아이들을 보호자 없이 절대로 아이들만 집에 둘 수 없다) 돈도 돈이지만 아이들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이 맘에 걸려서 십 년 내내 어디를 가든지 데리고 다니다가 오랜만에 맛보는 해방감에 나는 아이들을 시부모님 손에 맡겨두고 오랫동안 못 보았던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많은 날들을 밖으로 나다녔거든.

거기다 어머님 살림을 내 맘대로, 내 식으로 손대기 어려워 그저 조심스러웠지. 10년 전에 들인 며느리라 해도 같이 살아 본 적은 고작 6개월 정도고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았으니 새로 들인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라고 말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고.

워낙 입이 짧고 먹는 양이 적은데다 환경에 민감해 밥을 못 먹는 며느리를 끼니 때마다 지나치게 신경 쓰시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 더 밖으로 돌았나봐.

내놓고 반대는 안 하셨지만 연애할 때부터 탐탁치 않게 생각하신 것과 애지중지한 큰아들을 결혼과 더불어 당신에게서 떼어 미국 가려는 내가 어머님이 평소에 원하시던 며느리감은 아니었다는 것, 잘 알고 있었거든.

한 달간 거기 시댁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이었다.

"쟤는 왜 저렇게 말이 없니. 답답해 죽겠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십 년 전 워낙 말수가 적었던 나를 두고 하셨던 말씀. 어머님이랑 친해지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바로 그거였다. 말을 많이 하는 것. 그래서 실수 많더라도 마음을 전해드리는 것.

"새벽에 저랑 같이 올라가세요. 거기 날마다 모여 운동한다는 앞산에..."
"아버님도 그렇게 말이 없으세요? 글쎄 말예요. 아범도 그런다니까요. 아주 속상해 죽겠어요."
"어디요, 거기가 아프세요? 이쪽으로 돌아누워 보세요. 좀 주물러 드릴께요. 제 손이 좀 매워요 어머니. 아프면 아프시다고 하세요."
"제가 많이 늦었지요? 왜 이렇게 나와 계세요. 저 이제 길 다 알아요."
팔짱을 끼며 전에 못하던 애교를 부린 덕분에 나는 어머니 얼굴에 콕콕 박혀 주름을 만들어 놓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새벽에 앞산을 함께 오르며, 부침질을 하며, 구겨진 옷들을 다려 드리며, 머리에 염색약을 칠해드리며, 나란히 누워 TV 드라마를 보며... 그러면서 이젠 딱 세 개만 남은 어머님 이빨을 볼 수 있었다.

달동네를 전전하며 지금껏 살림과 자식 교육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먹는 것 줄이는 것 뿐이었다던 것. 자식 하나 낳을 때마다 이빨이 흔들리고 빠졌다는 것. 그래서 결국 세 개 빼고는 모두 해 넣은 남의 이빨이 되었다고...

가난 때문에 그 동안 구겨졌던 자존심을 읽었다. 집에 와본 친구들이 다신 연락도 안 하더라는 것. 그 후로 동창회 한번 나가신 적 없이 동네만 뱅글뱅글 도신 이야기들... 딸에게도 말 못 하고 사신 이야기,
"막내 시집보내고 나면 이혼하려고 그랬었다." 며느리라서 더 하기 쉬우셨을까.

여기 와서 짐을 풀면서 어머니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손수 사다가 까서 갈아 얼려주신 냄새 진동하는 마늘을 냉동실에 넣으면서. 시골에서 온 순 한국 토종 참깨라며 볶아 주신 참깨를 이웃들에게 돌릴 봉지에 나누어 담으면서. 치마폭 탁탁 털어서 쥐어주신 비행기 값은 또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겠지. 사드린 옷 한 벌과 장신구, 녹용과 화장품 같은 것들,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겠지.

시간이 지나도 안 없어질 것들을 세어보면서 어머님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가끔씩 늦는 며느리를 기다려 주신 것. 몇 번씩 튀김질하고 난 기름이어서 겁 없이 내버린 헤픈 씀씀이에 두말 하지 않으신 것.(어머니는 한 달 쓸 기름을 내버렸다고 딱 한번 말씀을 하셨다) 조심스럽게 엎어놓은 식기들을 나중엔 그대로 두고 보아주신 것.(어머니는 설거지를 끝낸 식기들을 물기 있는 채로 그대로 찬장에 바로 놓아 두셨다)

"그래, 듣고 보니 네 말도 맞다" 체면 차리러 나가는 거면 차라리 안 가겠다며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못된 며느리 말을 받아주셨던 어머님을 제일 많이 생각했다.

어머님, 짧은 동안, 부족한 며느리에게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하고 첫 번째 데이트길이 남산 공원이셨다구요. 다음엔 두 번째 데이트 길도 알려주세요. 저도 한국 간다고 아범이 처음 사준 원피스를 좋아서 가지고 갔다가 어머니 눈에 날까봐 한번도 못 입고 온 얘기 다음엔 어머님한테 할 수 있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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