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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통했다.
2학년을 모두 마치고 돌아온 딸아이의 리포트 카드와 ITBS(Iowa Tests of Basic Skills, 일종의 전국 학력평가)카드, 그리고 책읽기 평가서, 그 외의 가정통신문과 선생님이 보관하고 있다 되돌려준 활동물들 사이로 3학년 선생님은 "Mrs. Smith"라고 쓰인 종이가 보인다.

"내가 이런 선생님을 원합니다"라며 타겟을 삼았던 선생님.
그래, 바로 그 선생님이야. 미세스 스미스가.
내가 원하던 그 선생님이 딸아이의 3학년 선생님으로 정해진 거지.

Mrs. Smith
그 두 단어를 읽으며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낀다.
참 기분 좋은 일이다. 통한다는 것은.
아! 브룩과도 한 반이 되었다.

이쯤에서 나는 미세스 팁튼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
그녀와 일년 내내 통했던 얘기를.
내가 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이가 내 딸을 포커스 클래스(Focus Class, 일종의 우수반)에 추천해서만은 아니야.

내가 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슬픔에서 무서움으로 전이되어 가던 내 얘기를 그이가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슬픔을 그저 슬픔으로 남겨 놓을 수 있도록 그이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2학년에 올라 며칠 안되던 어느 날, 학교로 가는 아침 길에 넋을 놓고 차창 밖을 내다보던 아이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엄마-, 나무도 차도 하얀게 더 예쁜 것 같애"라고 말하면서.
슬픔이 무서움으로 완전히 바뀌던 순간이었다.

아이에게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 얘기를 듣던 날에도, 샤워를 하고 제 팔을 들여다보면서 어글리라고 말했을 때에도, 백인 남자아이에게서 피부색 때문에 나는 네가 싫다는 말을 듣고 와 침대 속으로 들어가 하루종일 이불을 쓰고 울 때에도,

1학년 때 담임이었던 백인 여선생의 남편이 흑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선생님 책상위의 사진을 보고 와서 어떻게 백인과 흑인이 결혼 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도, 나는 무섭진 않았다.

말도 못하게 슬펐고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끝에 가서는
"I don't get it." 이라고 말하고 마는 아이 앞에 내 무능이 안타까왔을 뿐.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차도 하얀 게 더 예쁘고, 나무도 하얀 게 더 예쁘다니.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도 하얀 게 더 예쁘고 나무도 하얀 게 더 예쁘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하얀 나무가 어디 있는데?
저것 봐, 나뭇잎은 초록색이야.
나무 밑둥과 가지도 하얀색은 아니지. 그렇지?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철 푸른 나무들 외에는 모두 잎새를 벗고 있는 중이었다.
흐린 하늘아래 잿빛으로 서있던 그 나무들이 하얗게 보였던 걸까?

그날부터 나는 무서웠다.
상처로 인한 아픔이 사물과 세상을 보는 비뚤어진 시각으로 고정되어 영원히 낫지 않을까 봐.

팁튼 선생님은 책 속에 빠져서 사는 내 딸을 좋아했고 그 아이가 그린 그림과 써놓은 스토리에 정말 크레이지(Crazy) 했다. 내 딸이 어느 선생님보다도 팁튼을 좋아한 것은 물론이었고.
그이는 첫 번째 학부모 상담이 있던 날 내 딸을 포커스 반에 추천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오후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아주 긴 편지를.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 얘기를,
그때가 세 살 반이었다는 것을,
아이가 많이 울었다는 것을,
그 애나 나나 지금 포커스반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손바닥만한 그 애의 가슴을 온통 휘저어 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학교생활에서 그 애의 지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아를 찾고 사회성을 기르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그리고 문화장벽에 대해서,
소수민족들과 이민자들이 겪을 수 있는 아픔에 대해서.

다음날 그녀가 친필로 쓴 꼭꼭 봉한 긴 편지가 아이 손에 들려왔다.(나랑 비슷한 나이에 어린 두 딸의 엄마인 그이는 아직도 컴퓨터나 타이프라이터에 능숙하지 못하다)

당신의 편지에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피부색과 자기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니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이 학교는 다양한 소수민족 배경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고 저는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아이가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디서나 자신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아이들이 스몰 그룹 활동을 통해 매주 파트너를 바꾸어 가면서 학습활동을 하도록 함으로써 서로 친해지고 또, 함께 그룹활동을 잘 해나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런 방법이 당신 딸에게도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회성 못지 않게 지적인 성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당신의 딸이 포커스 반에서 공부하게 되기를 바라고 그 아이가 포커스 반에 가더라도 정해진 시간에만 따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니 더 많은 시간을 저와 함께 보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딸을 내 "날개" 아래 둘 것이며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그 가슴아픈 부분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입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하고 그 아이들 하나 하나를 내 아이와 같이 다룰 것입니다.

당신 딸은 참 많은 탤런트를 가지고 있고 우리 반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그 애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편안해 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또 다른 방법으로 도와줄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어느 때고 주저 말고 얘기해 주세요.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포커스 반 시험 후 결과가 나오면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사랑으로,
테리 팁튼

그러나 그이의 편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이는 주말 평가서에 매주 짧은 글을 보내왔다.
나도 매주 짧은 답 글을 보냈음은 물론이고.

당신 딸이 요사이 뭔가 좀 다릅니다. 공부시간에 낙서가 늘고 있어요.

지금 학과목 모든 영역에서 균형 있게 발달해 가고 있습니다.

요사이 사회성이 많이 늘었어요.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 나온 듯이 보입니다. 여러 아이들이랑 골고루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단짝 친구도 생긴 것 같습니다. 브룩이랑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매주 그렇듯이 이번 주도 성공적인 학교생활을 보냈습니다.

그이는 2학년이 시작되고 학습과정과 학급을 소개하는 커리큘럼 나이트를 갖던 날, 빈 종이를 학부모들에게 나눠주고 1년 동안 아이들이 성취하기를 원하는 교육목표들을 세 가지씩 써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이는 내가 써 놓았던 그 세 가지 목표를 모두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거다. 일년 내내.

첫째, 한국문화와 미국문화 사이에서 분명한 자기 정체성 갖기
둘째, 친구들과 골고루 어울리며 사회성 기르기
셋째, 학과목 모든 영역에서 미세스 팁튼의 교육목표 도달하기

나는 별로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미세스 팁튼에게 얘기하기 이전에도 몇 명에게는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한국 친구 한 둘과 그리고 프리스쿨 선생님과 한 흑인 선생님에게도.
그러나 누구도 이렇게 나와 통해 본 적은 없다.

미세스 팁튼은 백인이었고 아이는 그이와 지내는 지난 1년 동안 한번도, 단 한번도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없었다. 놀랍게도. 그리고 또, 고맙게도.

덧붙이는 글 | 미국 사는 이야기 5번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 그리고 14-1번과 14-2번 "이런 선생님을 원합니다"를 보시면 이번 이야기를 좀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미국 사는 이야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참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약 한 달 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기사를 쓸 수 없는 환경을 맞게되므로 미국 사는 이야기 연재를 못 합니다.
한 달 후에 다시 만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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