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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안백발

.. 당시 한문 선생님은 홍안백발紅顔白髮의 외모로 늙기를 소망하는 호기 넘치는 분이셨다 ..  박원순과 52명-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2009) 47쪽

'당시(當時)'는 '그무렵'이나 '그때에'나 '그무렵 가르치던'이나 '그때에 가르치던'으로 다듬습니다. '외모(外貌)'는 '겉모습'이나 '얼굴'이나 '모습'으로 손질하고, '소망(所望)하는'은 '바라는'이나 '꿈꾸는'으로 손질하며, "호기(豪氣) 넘치는"은 "씩씩한"이나 "당찬"이나 "멋진"으로 손질해 줍니다.

 ┌ 홍안백발(紅顔白髮) : 늙어서 머리는 세었으나 얼굴은 붉고 윤이 나는 모습
 │   - 그는 홍안백발의 노인이었으나
 │
 ├ 홍안백발紅顔白髮의 외모로 늙기를 소망하는
 │→ 머리는 세어도 얼굴은 곱게 늙기를 바라는
 │→ 머리는 하얘도 얼굴은 맑게 늙기를 꿈꾸는
 │→ 흰바구니가 되어도 얼굴은 빛나기를 바라는
 │→ 흰머리가 되어도 고운 얼굴이 되기를 꿈꾸는
 └ …

온누리 모든 말은 저마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 삶에 알맞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쓰는 한국말은 한국사람 삶터에 알맞게 맞추어져 있고,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 쓰는 중국말은 중국사람 삶터에 알맞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한자말은 한자말일 뿐, 한자말이 우리 말일 수 없는 까닭은 한자란 처음부터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 중국사람답게 꾸리는 삶에 알맞게 지은 글이요, 이런 글로 옮겨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깥말인 한자말 가운데에도 우리가 받아들일 만하거나 쓸 만한 말이 있기 마련입니다. 영어 가운데에도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낱말이 있고, 일본말 가운데에도 우리가 쓸 만한 낱말이 있습니다. 영어라고 더 받아들인다거나 일본말이라고 부러 꺼릴 까닭이란 없습니다. 우리 이웃을 헤아리고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쓸모와 쓰임새를 찾아 슬기롭게 쓰면 넉넉합니다.

'홍안백발'이라는 한자말을 살펴봅니다. 이 한자말은 말 그대로 "붉은 얼굴 + 흰 머리"를 뜻합니다. 남다른 뜻이나 새로운 느낌을 담은 낱말이 아닙니다.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 중국 삶터에 걸맞게 지어서 쓰는 낱말입니다. 우리들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 삶터에 걸맞게 지어서 쓰는 낱말이라 한다면 '붉은얼굴'이나 '붉은낯'이라 하거나 '흰머리'나 '하얀머리'라 할 테지요. 우리가 'red face'나 'white hair'라 할 까닭이 없듯이 '紅顔'이나 '白髮'이라 할 까닭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 그는 홍안백발의 노인이었으나
 │
 │→ 그는 머리는 세었어도 얼굴은 고운 늙은이었으나
 │→ 그는 머리는 하얗지만 얼굴은 고운 할아버지였으나
 └ …

국어사전을 다시금 뒤적입니다. '홍안'과 함께 '朱顔'이라는 한자말이 실립니다. 두 한자말 모두 "붉은 얼굴"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토박이말 '붉은얼굴'은 안 실려 있습니다. 그나마 '흰머리'는 토박이말로 다루며 실립니다. 이와 함께 한자말 '백발'도 실려 있어요.

곰곰이 더 생각해 보면, '흰머리'는 국어사전에 실리지만, '검은머리'라든지 '붉은머리'는 안 실립니다. 밤빛과 닮은 '밤빛머리'는 아예 실릴 턱이 없을 테지요. 가을 들판을 가리켜 금빛 들판이라고는 하지만, 머리카락이 금빛인 사람을 놓고 '벼빛버리'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金髮'이라고만 합니다.

외길로 쏠려 있는 우리 말삶이라 할 만합니다. 외길 가운데에서도 아름답거나 씩씩하거나 튼튼한 외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터전을 옥죄거나 내리누르거나 비트는 외길에 갇혀 있는 우리 글삶이라 할 만합니다.

슬기로움을 빛내지 못하고, 아름다움을 일구지 못합니다. 똑똑함을 나누지 못하고, 따스함을 함께하지 못합니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어도 얼굴은 고운 할매와 할배가 있다고 한다면, 제아무리 어리숙하거나 모자라거나 어설프다고 여길 토박이말이 하여도 맑으며 곱고 싱그러운 우리 말글이 되도록 북돋울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 흰머리 고운얼굴
 ├ 흰바구니 고운낯
 ├ 고운늙음
 └ …

예식장에서는 누구나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 같은 말마디를 읊습니다. 검은머리이든 까만머리이든 우리가 우리 터전에서 우리 이웃과 나누는 말마디에서는 '검은 머리'나 '까만 머리'처럼 띄어서 쓰기보다는 한 낱말로 붙여서 쓰면서 국어사전에 넉넉히 실을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일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사람은 중국땅과 중국 터전에 걸맞는 말마디로 '紅顔白髮'을 지었으니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흰머리 고운얼굴"이라든지 "고운늙음"처럼 새로운 말마디를 살며시 지어 보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글자수를 맞추어 "하얀머리 고운얼굴"이라 하거나 "흰머리 고운낯"이라 해 보면 한결 낫겠지요.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삶이 있고, 생각을 일구는 사람한테는 뜻이 있으며, 생각을 길어올려 나누는 사람한테는 길이 있습니다. 생각을 살가이 펼치는 사람한테는 사랑이 있고, 생각을 넉넉히 어루만지는 사람한테는 믿음이 있으며, 생각을 골고루 꽃피우는 사람한테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 땅 이 나라 이 겨레한테도 사랑과 믿음과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말과 넋과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앞으로는 한둘쯤은 태어날 수 있으리라 믿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고사성어, #상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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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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