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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그녀는 민필호와 사랑을 약속했던 삼청동 측백나무에 가 본 적이 있었다. 마른 잎과 바람 소리에 계절이 달아나고 있었다. 푸르던 잎에 추위가 물드는 것을 보며 그녀는 떠난 남자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 일을 두세 번 더 했던 그녀는 어느덧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새롭게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이를테면 노을이라든지 석양 같은 것들이었다. 그녀는 빈 하늘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겨울은 겨울대로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민필호와 광통교에서 다리밟기를 하던 일이 떠올라 장옷을 입고 대보름날 혼자서 그곳에 나가 보기도 했었다. 보이는 남자마다 민필호를 닮기도 했고 아닌 것도 같았다. 그녀는 숭인동 채소시장이나 아차산성 같은 데를 아픈 추억의 장소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명백하게 깨닫고 있었다. 자신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남자는 민필호 외에는 없었다. 3년이 넘도록 소식조차 전해오지 않는 남편이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남편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남편은, 민필호에게는 없는 다른 중요한 것을 가진 남자였다. 그가 있는 한 그녀의 생활에는 안락이 있었다. 그녀는 유달리 물질에 행복해 하는 여자는 아니지만 물질이 없으면 이내 불행해지는 여자였다. 게다가 남편은 다른 여자들의 선망이 되는 남자였다. 그가 만약 다른 여자에게 간다면 그것만은 자기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민필호를 잊을 수는 있지만 김태수를 잃을 수는 없는 여자였다.

최도애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 그녀였지만 누가 보아도 아기엄마임이 분명해 보이는 외모였다. 그녀는 아까 보았던 여자를 생각해 보았다. 최도애는 무심코 들어 넘겼던 예관이란 이름을 얼핏 떠올렸다. 시아버지가 칭찬하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심부름을 온 그 여자도 중국에서 왔을 터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남편 김태수를 알고 있었다. 최도애는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세수하고 와서 피부 크림을 찍어 얼굴에 발랐다. 그러고는 맹렬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얼굴에 분까지 바른 그녀는 새 양장을 꺼내 갈아입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과 민필호의 모습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저녁 8시면 어두워진 시간이긴 했지만 민필호가 최도애를 못 알아 본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도애는 두 사람이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민필호를 알아보았다. 민필호는 자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낮보다 더 화려하게 꾸미고 온 여자는 민필호의 신혼 아내임이 분명해 보였다.

김인용은 두 사람을 친절히 맞아들였다. 그들이 김인용의 방에 들어가자 최도애는 대청에 망연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 손님을 따라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인용은 두 사람에게 앉을 자리를 권했다.

“다과로 하실까 아니면 주안상을 보라고 할까요?”
“어른 드시고 싶으신 걸로 하시지요.”

백주원이 대답했다.

“에미야, 주안상을 좀 봐 오너라.”

“인사 올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김인용에게 절을 올렸다. 절을 받은 김인용은 몸을 낮춘 채로 조그맣게 물었다.

“두 분은 부부가 아니시지?”

민필호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금세 알아보시는군요.”
“역시 신공은 대단하신 분이야. 이렇게 하고 다니면 누구도 의심할 리가 없지.”

김인용은 신규식의 안부를 묻더니 백주원이 주는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때 최도애가 주안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에미야, 우리 먼 친척 되시는 분들이다. 결혼 인사를 드리러 오셨단다.”

민필호는 그때야 비로소 최도애를 알아보았다. 그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최도애도 민필호가 자신을 알아봤다고 느꼈다. 그러나 최도애는 민필호보다 훨씬 더 긴장하고 있었다. 백주원 역시 뭔가 있다는 낌새를 차렸다.

그러나 민필호는 금세 침착해졌다.

“안녕하세요. 최도애 씨.”

최도애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김인용이 눈을 크게 뜨며 민필호를 보았다.

“어른의 며느리 분은 제가 휘문의숙 재학 중에 같은 클럽 활동 회원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최도애는 긴장을 풀면서 말했다.

“반갑습니다. 민 선생님. 이렇게 뵐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우리 며느리에게 범상치 않은 과거가 있었나 했지.”

그는 민필호에게 귀엣말을 한다는 듯이 두 손을 모아 둥그렇게 만들더니,

“하기야 과거는 여자만 있는 게 아니지?”

백주원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모두가 따라 웃었다. 최도애만 그들이 왜 웃는지를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주원이 웃음을 그치고 정색하며 말했다.

“어르신, 아드님 김태수 씨는 우리와 함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도애의 고개가 백주원 쪽으로 휙 돌아갔다. 다음으로는 김인용이 놀란 것 같았다. 민필호도 김인용만큼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김인용은 신규식이 자기에게 왜 사람을 보냈는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적지 않은 돈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예관 선생이 중국에 가실 때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 그대로 은행에 넣어 더 불렸다’고 말하며 그는 껄껄 웃었다. 그런데 그 예관이 아들까지 돌보고 계신다니 더 드려야겠다고 말하며 금고를 열었다.

최도애는 정신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민필호도 나름대로 당혹스러웠다. 그는 최도애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쯤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백주원은 예의 바르고 침착했다.

가장 기분이 좋은 사람은 김인용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서운한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존경하는 예관 밑에서 공부도 하고 유람도 하며 지낸다는 말을 듣더니 적이 맘을 놓았다.

백주원과 민필호를 배웅한 김인용은 며느리를 불렀다.

“넌 저 두 사람이 부부인 것 같으냐, 아닌 것 같으냐?”

최도애는 시아버지의 질문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까 부부라고 하셨잖습니까?”
“알아맞혀 봐라. 내일 아침까지다.”

김인용은 재미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올라갔다.

최도애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기치 않게 민필호를 본 충격과 남편의 소식을 알게 된 점이 그녀로 하여금 많은 상념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시아버지의 뜬금없는 질문까지 있어 그녀는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민필호에게 그런 아름다운 부인이 있다는 것에 절망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남자를 상실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부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언질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들이 부부가 아니라면 그녀는 남편과 같이 지낸다고 했으니 남편하고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거야말로 자신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최도애는 논리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민필호의 여자인 것도 싫었고 아닌 것도 겁났다. 다만 그녀는 그 여자가 두 남자 모두와 별 관계가 아닌 경우를 미처 상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비평을 환영합니다.



태그:#민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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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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