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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에 따른 국제 정세의 변화는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중·일간의 교섭이 결렬되어 개전의 조짐이 보이는 등 국제 정세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중·일 전쟁 결과 일본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 계획이 와해되므로 지금 결사적으로 중국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암살대를 조직하고 거병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기로 결의했다. 당연히 그들은 일본이 독일이나 중국에게 패망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면 일본은 패전국에 속할 것이고 이에 따른 국제 정세의 변화로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비하여 빨리 당이나 정부를 만들어야 하며, 그 당이나 정부가 주도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5년부터 1917년까지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상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상설은 1915년 어느 날 간도로부터 상해로 와 신규식을 만났다. 그는 신규식보다 8년 연상이었다.

이상설은 1894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수 있는 학자'라는 평가를 받은 문인이었다. 이상설은 성균관 교수를 역임하고 궁내부 특진관을 맡고 있을 때,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의 저의와 부당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으로 하여금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게 하기도 했다.

그는 의정부 참찬으로서 을사늑약 체결을 저지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가려다 일본 헌병의 제지를 받게 되자 헌병 책임자의 어깨를 장죽으로 후려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고종에게 사직(社稷)과 함께 할 각오로써 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일찍이 그가 민영환의 순국 자결을 알리는 가두연설을 종로에서 감행할 때 신규식은 청중 틈에 서서 그의 연설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정사(正使)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총독부가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해 놓고 있는 조국에 그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회의에 연해주 대표로 참가했다. 이때 그는 다섯 살 어린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국내에서 독립협회 사건으로 복역 중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와 조지워싱턴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연해주 대표로서의 소임 수행을 위해 미국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같은 연해주 대표였던 이승만과 다른 점이었다. 이것은 이상설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의 성향을 알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을 우선했으며, 그가 독립운동 내내 취했던 노선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어 독립하는 방법 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상설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승희, 김학만, 정순만 등과 함께 흥개호(항카호) 남쪽 봉밀산에 땅을 샀다. 그들은 100여 독립 운동가 가정을 규합하여 이주케 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고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그는 일제가 조국을 병탄하자 독립결의선언서를 작성,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교포들을 규합했다. 그는 의병장 유인석을 필두로 8,624명의 독립 운동가가 서명하는 거사를 주도했다. 이어 그는 선언서를 중국·미국·러시아 등의 정부에 우송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인이라는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투쟁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을 의지를 갖고 있음을 내외에 천명한다."

영어·불어·러시아어를 잘 알았던 이상설은 놀랍게 수학에도 천부적 능력이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 수학서인 <산술신서>를 출간해서 청년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설은 고종을 데려와 임시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야 정부의 정통성이 확립될 수 있다는 신념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과거 급제한 문신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언제나 독립운동의 통합전선 구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벌써 전에 의병 세력을 규합하여 13도 의군을 결성하기도 했었다. 그는 권업회 결성과 권업신문 운영, 광복군 사관학교 설립 운영, 그리고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되어야 할 주요한 사업들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의 추대를 받아 대한광복군 정부의 정통령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이상설은 1910년대 한국 독립 운동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낸 인물이었다. 그는 상해에서 신규식이 이끄는 동제사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고 많은 독립지사가 그곳으로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는 독립 운동의 전개 방법에서 신규식보다 더 순수해서 또 그만큼 조급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1차 대전의 발발로 러시아 만주 지역에서는 공개적인 활동이 봉쇄되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 대륙에 통합 조직을 만들어 국제 정세 변화에 따른 독립 기회를 능동적으로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규식은 평소 존경해 왔던 이상설을 극진한 정성으로 영접했다.

"우리도 중국의 손중산처럼 혁명당을 만듭시다."

신규식은 기꺼이 동의했다.

"구학문을 수학한 왕조 관인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 근대 학문을 섭취하신 선생님과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 동제사 청년들이 적극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상설의 방식은 신규식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상설은, 혁명당의 활동은 상해 지역을 중심으로 하되 본부는 북경에 두자고 했다.

"현재 독일이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고 또 중국의 원세개 정권이 일본과 전쟁을 할 것 같으니, 중국의 지원을 얻으려면 북경에 본부를 두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사실 신규식은 북경 정부의 시찰 대상 인물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는 손중산의 중국 혁명 지지자였다. 그는 이미 1912년 신해혁명에 적극 가담했고 원세개 황제 체제에 반대하는 혁명전선에서 무기를 들고 싸운 전사였다.

"만약 원세개 정권이 몰락한다는 가정도 해 놓으시고 대비하신다면 찬성하겠습니다."

"대일 전쟁 시 일본의 요충지 공략을 위해서는 북경이 훨씬 적당한 위치라고 봅니다. 그리고 지부를 만들더라도 독립 전쟁 발발에 대비해 일본의 군사 요충지와 가까운 곳 위주로 하고 싶소."

"안동과 봉천과 장춘은 일본군의 철도를 공략할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역시 중국 사정에는 예관이 누구보다도 밝은 것 같소. 그리고 국내 진입도 해야 하므로 나남, 회령쯤에도 지부를 둘까 하는데 예관의 의견은 어떻소?"

"생각만으로도 후련한 적극적인 발상입니다."

이상설의 방식은 신규식의 노선과 여러 가지 차이를 드러냈다. 그는 혁명당이 지향하는 정부 형태를 군주제로 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지금 일본과 적대국인 독일과 중국이 모두 군주제이므로 우리가 공화제를 표방하는 것은 그들과 동맹을 하는 데 불리할 것 아니겠소? 그러니 우리는 당수를 광무황제로 하고 그 분을 모셔와 정부를 만드는 작업을 서두릅시다."

그들은 창당과 운영에 소요되는 자금을 중국 혁명당처럼 기부나 모집으로 충당하기로 합의했다. 부득이한 경우 부도덕한 자의 것은 강탈도 허용하기로 했다. 혁명당의 규칙과 취지서는 박은식이 기초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신속히 조직 결성에 착수했다. 본부와 지부를 두고 본부장에 이상설이 취임했다. 중국에는 상해·장춘·연길 등에 지부가 결성되었다. 신규식이 상해 지부장을 맡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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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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