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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외골수라니까요. 사내가 기생하고 술도 마시게 되면 마셔야지요.”
조정완은 남편에 대한 칭찬을 계속 듣기가 멋쩍었는지 이렇게 응수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웬일인지 명호가 계속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얘는 한 번 웃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몰라요.”
명호는 웃음을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큭큭 웃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또 나섰다.
“같이 좀 웃자. 대관절 왜 웃는 거냐?”
의외로 명호는 명랑하고 밝은 데가 있는 소녀였다.
“저는 두 분이 부부인 줄 알았거든요. 큭큭.”
“아닌 줄 알았으면 됐지, 뭐가 그렇게 우습냐?”
조정완도 살짝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림책에서 본 꼬마 신랑하고 비슷했어요.”
네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민필호만 조금 웃다 말았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박찬익과의 덕수궁 약속 때문이었다. 조정완은 근심 어린 얼굴로 두 사람을 배웅했다. 명호는 문 밖까지 따라 나와 아주 단정하게 인사하며 필호에게 말했다.
“어제 정말 결례했습니다. 무사히 가시기를 빌겠습니다.”

그들이 멀어지자 백주원이 필호에게 말했다.
“여자는 어려 보여도 남자보다 언제나 속이 차 있다는 것을 명심해.”

두 사람은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덕수궁에 도착했다. 다른 대궐들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덕수궁 역시 망국의 대궐답게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거처로 시작한 덕수궁이었다. 그랬다가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폐위된 인목대비가 머무를 때는 서궁으로 격하되었다. 경운궁의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불과 얼마 전 고종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한민족에게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1896년 을미사변에서 일본인에게 왕비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임금이 피난함)했다고 해서 ‘아관파천’이라고 불렀다.

고종은 1년 간 친러파를 기용하여 친일 내각을 와해시킨다. 아직 러시아와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을미사변으로 인한 나쁜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 러시아는 한국의 여러 이권을 확보하려고 몸부림친 나머지 일본과의 비밀 협상 끝에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 등을 얻어낸다.

구미 열강은 아관파천에는 불간섭 입장을 표명하면서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광산채굴권, 전차·철도 부설권 같은 것을 필두로 한 근대 시설과 자원 개발에 관한 총체적인 이권을 탈취해 갔다. 이 시기에 조선은 경제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터전을 외국에 거의 넘겨 버린 것이었다.

사실 조선의 국운이 결정적으로 휘청한 것은 바로 아관파천 1년의 기간이었다. 아관파천은, 옹졸하게 말해서, 나름대로는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전략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이제이(以夷制夷)는 그런 경우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이제이는 기본적으로 국토 밖에서 적과 적을 이간질시켜 싸우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주권의 핵심부인 도성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일을 이이제이 전략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였다. 결국 이것은 오랑캐끼리 싸움을 붙이기는커녕 오랑캐끼리 야합하도록 만든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은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외국 공사관에 장기 체류하고 있는 군왕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립협회가 앞서서 고종의 환궁 여론을 주도했다. 독립협회는 대부분 일본 편을 들었다. 얻을 것을 얻어낸 러시아도 고종에게 그만 나가 달라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고종은 경복궁이 못내 두려웠다. 전국 유림의 환궁 상소가 쇄도했고 장안의 시전들이 철수 스트라이크를 벌이려 하자 마지못해 환궁을 결심한 고종은 경복궁 대신 덕수궁을 선택하여 파천 만 1년 만에 궁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환궁은 환궁이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해 10월 12일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라고 하는 대한제국의 탄생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물론 이것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려는 독립협회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

백주원과 민필호는 말없이 망국의 대궐을 거닐었다. 그들은 석어당과 중화전과 준명당 앞에서 한 번씩 발을 멈췄다. 그리고 초가을의 문턱에 있는 왕궁의 추석 위를 서성거려 보았다. 수백 년이나 된 회화나무들과 은행나무들은 자기들 심은 뜻을 전혀 모르는 듯 무심코 서 있었다.

“나는 미국에 가서 독립 운동을 한다는 작자들이 맘에 안 들어.”
박찬익이 한 말이었다. 그는 만나기로 한 사람 중에 둘이나 미국에 갔더라고 했다. 그는 일이 잘 안 되어 지방에 좀 더 다녀보겠으니 먼저 가서 그렇게 보고해 달라고 했다. 백주원과 민필호는 조심하시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찬익은 씩 웃으며, “두 분이 신방은 차렸나?”라고 말하더니 손을 들어 인사하고 뒤돌아섰다.

그는 석양을 바라보며 휘적휘적 돌담길을 따라 걸어갔다. 백주원이 급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선생님 추탕에 대포라도 함께 하시고 가시지요.”
박찬익은 다시 씩 웃더니 팔을 크게 저으며,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다시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아마 기차표라도 미리 끊어 놓은 듯싶었다.

숭교방 김인용의 며느리 최도애는 매일신보에 연재되는 소설 ‘무정’을 읽고 있다가 한 방문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렇게 예쁜 여자가 조선에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녀는 소설에 나오는 김선형이나 박영채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처음 그녀는 백주원 앞에서 아예 주눅이 들어 버렸다.

“김인용 선생님 댁 맞지요?”
최도애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드님은 김태수 씨이고요.”
백주원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확인하듯이 물었다. 최도애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안해졌다.
“그런데요?”
“김인용 선생님께 전해 주십시오. 오늘 밤 8시에 예관 선생 심부름으로 온 사람이 찾아뵙겠다고요.”
백주원은 정중히 목례를 하고 뒤로 돌아섰다.

최도애는 자기 방에서 물끄러미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 같은 것에 휩싸여 있었다. 신혼 시절이 행복하지 않은 여자는 아주 드물 터이었다. 최도애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귀여워 해주는 시아버지와 화 내지 않는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몇 개월을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았었다. 언니의 남자를 가로챘다는 미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니는 언니대로 유학 생활에 만족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언니의 유학 자금을 지원한 것이 지금 시아버지라는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첫 아이를 낳기 전에 이미 외로움을 체험했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에게 열정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소한 징후들을 여러 번이나 보고 느꼈다. 사소한 징후들이란 주로 남편의 표정이거나 눈빛이거나 말씨 같은 데에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따금씩 민필호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시아버지에게도 소외감을 느끼고는 했다. 시아버지는 오로지 손자에게만 대부분의 관심을 집중했다.

게다가 남편 김태수는 거의 자신과 상의도 없이 중국으로 가 버렸다. 중국에 가는 남편은 가기 일주일 전쯤에야 자신의 출국 사실을 그녀에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 후로는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 그녀는 가끔 오미자 물을 만들어 진홍색 빛깔을 넋 놓고 볼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으레 그녀는 민필호의 얼굴과 눈빛을 떠올려 보고는 했다. 순서로 치면 그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민필호가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오미자 물을 우려낸 것이었다. 그녀는 민필호가 자기처럼 오미자 물을 보며 자신을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선조들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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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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