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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몬트 주 경계에서 보이기 사작하는 화이트 리버(White river).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 문종성
본유적 빈곤과 빈약한 영적자원을 가지고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매일 아침 텐트나 침대 위에서 기도를 드리게 된다. 보통은 오늘 주행에서의 안전과 숙식, 그리고 내가 만날 사람에 대한 부분을 놓고 기도한다.

특별히 난 이번 여행에서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을 만나길 원한다. 하나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 또 하나는 나에게 조언을 해 주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도전받고 싶은 사람이 그것이다. 물론 내가 바라는 상황과 사람만 만날 수 없다는 불가능한 예측이 오히려 더 흥미진진한 여행의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오늘은 딴 건 모르겠는데 꼭 좀 샤워하게 해 주세요."

그랬다. 나는 지난 이틀 동안 샤워도 못한 채 후줄근한 채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자전거 세계일주라며 텐트까지 가지고 간 마당에 노숙이나 캠핑을 예상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이틀 동안 땀 냄새로 가득한 채 지내야 하는 것 또한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버몬트(Vermont) 주. 사실 이 지역은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조차 그 위치나 특성을 잘 모르는 동네다. 별명이 '그린 마운틴 스테이트(Green Mountain State)'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마저 푸름으로 물들어 버릴 만큼 모든 것이 초록광채를 내뿜고 있다.

그 유명한 <가지 않은 길>의 저자 로버트 프로스트가 이곳에서 청경우독(晴耕雨讀)하며 내공을 쌓았다고 하니 과연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자연주의 사조를 지닌 예술가들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온통 푸른 곳, 버몬트

▲ 미 뉴잉글랜드에서는 도시 외곽 지역 어디를 가도 도로 주변에 골프장이 있어 라운딩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자기 집 앞마당에 깃대만 꽂으면 골프장이 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골프클럽이 없는 걸로 보아 사유지로 보인다.
ⓒ 문종성
관광 자원이라곤 단지 400여개의 천연 호수가 그나마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미국에서 가장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캐나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운전자들이 이곳의 정취에 대해 깊이 인식할 겨를도 없이 지나치기도 한다.

이곳에 유명한 먹거리라면 메이플(단풍) 시럽이 유명한데 설탕보다 당도가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천연소스라 건강을 해치지도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얼마나 그 맛과 효능을 신뢰하는지 불고기에다도 메이플 시럽을 발라 먹는 이들이 있다.

▲ 버몬트 주 입성을 알려주는 표지판. 국도라서 그런지 큰 표지판 하나 없이 단촐하기만 하다.
ⓒ 문종성
5월 21일. 조그만 표지판만이 버몬트 입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14번 국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 주(州)의 유일한 중소도시 벌링턴(Burlington)으로 가기로 했다. 마침 오전부터 내가 가는 길 옆으로 강이 하나 흐른다. 화이트 리버(White river)는 도로 지도에도 아주 작게 표시되어 있을 만큼 그 존재가 미미한 강이지만 나에게는 한 줌의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적당히 거친 물살에 맑은 수질, 그리고 강 가 쪽으로는 그리 깊지 않은 수심이 오늘의 샤워 걱정을 덜 수 있게끔 확신을 준다.

'야호! 오늘은 이곳에서 텐트를 치는 거야. 신나게 물장구 한 번 쳐보자고!'

그리하여 들뜬 기분으로 버몬트 내륙을 향해 거침없이 들어갈고 있을 때였다. 한 가정이 자기 집 뜰에서 한가로이 저물어 가는 해를 인테리어 삼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생존을 위해 민첩하게 반응하는 여행자의 오감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인해 심하게 흥분되었다. 이들의 환영은 호기심에 그들의 뜰로 불쑥 들어가 인사를 건넨 다음에야 한 박자 늦게 이뤄진다.

무작정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날씨 참 좋군요. 게다가 이 버몬트는 온통 초록빛이 감도는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자전거를 타는데 별로 힘들지도 않아요. 와우~ 정말 멋진 길인데요!"

묻지도 않았는데 일단 이 곳의 칭찬부터 늘어놓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부성 발언이 아닌 사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가족 중에 할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끄덕이며 대꾸한다.

"허허, 그래요? 이곳 자연이 좋긴 좋죠. 시원하고 도시처럼 빡빡하지도 않고. 그런데 자전거라니, 당신 체력이 참 좋은가 보군요."
"아니에요. 몸 상태에 따라 주행거리를 조절하니 체력은 크게 문제되지는 않아요."
"피곤하지 않아요? 아, 마침 우리 소시지를 해서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혹시 저녁 식사 했어요?"

이번엔 그의 아들이 대화에 끼어들어 나의 상황을 파악한다.

"식사요? 안 했죠!"

이래서 가끔 지성보다는 감성이 무서운가보다. 지나갈 때 그 집의 기운이 어째 심상치 않더니만 마침 불고기를 구우려던 참이었다니…. 그의 집은 레이먼드(Raymond) 가(家)였고 방금 대답한 아들의 아내는 임신 9개월 중이었다.

"다음 달이면 애가 나와요. 딸이래요."

배가 불룩해진 그녀의 배를 쓰다듬은 그의 손이 무척 다정하고 따뜻해 보인다. 그런 날이 있었다. 달님도 사라지고 별빛만으로 세상을 비추던 밤, 텐트 안에 누워 김수지의 '아가에게'라는 가스펠 노래를 듣다가 그만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 적 말이다. '나에게도 아버지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다가올까? 내 친구들처럼 주위 어른들처럼 그 경외감과 감동을 나 역시 맛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의 끝에는 괜스레 아버지로는 아직 여러모로 준비가 덜 됐다는 자책감에 그만 멀건 유리 방울을 내보냈던 것이었다.

"축하해요."

그 짧은 한 마디에도 진심과 부러움이 정제되지 않고 그대로 표현된다. 시골에서 3대가 함께 사는 것을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보통의 경우 자식들은 도회지에서 직장에 다니고 노인들은 은퇴 후 연금으로 살아가는 경우를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에는 열이면 아홉은 대개 자식들의 사진을 냉장고에 여기저기 붙여놓고 자랑 아닌 소개를 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의 가족은 독특하면서도 굉장히 화목해보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영어로 떠오르지 않아 미안해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말하려는 게 영어로 잘 생각나지가 않아요. 사실 영어를 잘 못해서 말이죠."

그 때 레이먼드의 부인이 남편에게 장난스러운 얼굴로 넌지시 물었다.

"당신은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아니."

레이먼드는 장난치듯 대꾸했다.

"우린 한국말을 아예 못하잖아요. 그래도 당신은 영어가 그 정도면 굉장히 좋은 편이에요. 오히려 우리가 더 미안한 걸요."

그들은 유머러스하게, 손님이 무안해하지 않게, 그리고 진심으로 괜찮아했다.

▲ 화목한 레이먼드의 가족. 이제 곧 태어날 아기까지 3대가 함께 살게 된다.
ⓒ 문종성
그들이 접대한 저녁 자리에서 포식을 한 후 한껏 만족감을 드러냈다. 미 동부의 기온은 오후 5시까지도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다가 6시를 전후해서 급격히 낮아진다. 소시지와 햄버거로 속을 든든히 채웠으니 이제 더 추워지기 전에 숙소 자리를 찾아봐야 할 시간이다.

"오다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봤어요. 오늘은 그 근처에서 하룻밤 자야겠어요."

강 다리 쪽에서 잔다는 말에 그들은 염려하는 기색을 보인다.

"글쎄, 괜찮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가까운 곳이니 혹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챙겨줄 수 있을 거 같아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버몬트에 들어와서 당신들을 만나 기뻐요."
"우리도 누군가를 대접할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찾아오세요."

레이먼드 가족과 기분 좋게 헤어진 후 아까 봐둔 강 위 숲 속 오솔길로 가서 하룻밤 몸을 뉘일 보금자리를 폈다.

▲ 숲 속에서는 동물들의 큰 울음소리보다 되레 움직이는 작은 발자국 소리에 더 민감해진다. 이것이 배산임수(?)의 최적화된 명당자리.
ⓒ 문종성
이 세상은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이다. 그러나 그것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 골드니

텐트를 친 뒤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가지를 들고 강 가로 내려갔다. 멀리서 보는 것보다 물살은 더 거셌으며 맑고 짙푸른 색이 어딘지 모르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7시가 되어 날씨가 꽤 쌀쌀해진 상태에서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강물에 조심조심 몸을 담갔다. 이런 걸 두고 자연과 합일한다고 하는 건가. 엄살이 심해 오들오들 살이 떨려오지만 몸에 비누칠을 한 다음 어린 아이처럼 혼자서 물장구도 쳐보고 되지도 않는 수영도 해 보면서 동시에 목욕까지 해결한다.

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 팬티만 걸친 채 강으로 뛰어들다. '화이트 리버(White river)'의 수질은 굉장히 깨끗하다. 그리고 차갑다.
ⓒ 문종성
객지에서 물귀신이 되기 싫은지라 최대한 조심해서 강가에서만 머물렀다. 반대편에는 한가한 두 사람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고, 시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카약을 즐기는 사람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하다. 이럴 땐 무관심이 오히려 감사하다.

30분 정도 강에서 혼자 쇼를 한 다음 주변을 정리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을 이불 삼아 고단한 몸을 눕히자 아련하게 집과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러다 문득 혼자서 탄식을 했다.

'아, 아침에 기도할 때 '실내 숙소에서 샤워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어야 하는 건데….'

정말 그랬다. 생각해 보니 어찌됐건 샤워를 하게 한 건 하늘의 자비로운 뜻이었지만 너무 급히 소망을 피력하는 바람에 한 가지 더 추가할 수 있었던 항목을 빠뜨려버린 것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한낱 영욕의 정신으로 가득 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해도 참 감사했다. 오늘마저 씻지 못했다면 여행자가 아닌 고행자로 탈바꿈할 위기였으니 말이다.

온 몸과 정신까지 깨끗해진 상태에서 고요한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선명한 연주가 되어 부드럽게 귀로, 귀에서 다시 심장으로 타고 흘러 들어온다. 그 때를 맞춰 잠시 접어둔 가족과 친구들의 생각을 다시 끄집어낸다. 그리움으로 범벅된 그들 때문에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강과 풀벌레와 새들이 연주해 주는 위로의 자장가로 어렵게 잠을 청해본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꿈에서라도 봤으면….'

다음 날 아침, 밤새껏 밀어낸 그리움은 어느 새 날 닮은 그림자로 누워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현재 미국 버팔로에 있으며 클리블랜드를 거쳐 시카고로 갈 예정입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버몬트, #강, #팬티, #한국어,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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