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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겉과 속이 달라서 더욱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매일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또 하루를 살아내는 소위 '사나이'의 순정을 조각하는 김원근 작가의 작품이 그렇다. 미대를 졸업한 후 10여 년 동안 미술계를 떠나 생활전선에서 뛰었던 김원근 작가는 생활인으로서의 경험을 작품에 잘 담아낸다.

아름답지만 멀게 느껴지는 작품보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생활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친근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김원근 작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조각품들을 보면 가장 먼저 거친 외모가 눈에 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다가가 유심히 들여다보면 수줍은 듯 여린 미소를 띤 남자들의 눈빛이 작가의 그것처럼 따뜻하다.

진심이 아니면 말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오직 진심만을 담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는 '이 시대의 진심남' 김원근 작가. 4월에 서울 방배동 스페이스 엄에서 열린 초대전 '고진봄래(苦盡春來)'에서 처음 만난 그와 지난 6월 14일, 다시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남성 캐릭터 자주 나오는 배경.... "권투 경기가 내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
 
스페이스 엄에서 기자가 직접 촬영
▲ 퍼그맨 스페이스 엄에서 기자가 직접 촬영
ⓒ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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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님은 좋아하는 여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남자, 갓 연애를 시작해 행복을 만끽하는 남자 등 사랑에 빠진 남자 캐릭터를 주로 선보이십니다. 작가님의 하나의 메시지를 꼽는다면 아마도 사랑일 것 같은데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사랑은 뭔가요?

"사실, 저는 사랑이 뭔지 잘 모릅니다. 그래도 굳이 답을 해보자면, 매일 보고 싶은 마음 아닐까요? 같이 있고 싶고, 보고 싶고 그런 마음이요. 어느 날, 아내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면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어요. 아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더군요. 제가 쉽게 답하지 못하니까 아내가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에 관한 작품을 만든다며 웃더라고요." 

- 사랑을 잘 모르신다고 하셨지만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사랑에 관한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습니다. 클래식을 들으면서 작곡가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사랑, 엘리제를 향한 베토벤의 사랑이 제게 영감을 줍니다. 사랑은 다 고독하고 힘든 거 같기도 해요. 슈만은 스승의 딸 클라라를 사랑해서 법정 소송까지 갔죠." 

- 아내분의 질문에도 쉽게 답하지 않고 다시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오히려 진짜 사랑처럼 느껴집니다.

"맞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저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비록 사랑이 뭔지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아내를 생각하는 제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작가님 작품 중에 권투선수가 많이 보입니다.

"2008년에 다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뭘 하면 좋을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당시 이종격투기의 인기가 나날이 치솟았고 다양한 종목 선수들이 격투기 분야로 넘어갔어요. 권투나 레슬링 선수 출신들은 격투기를 잘했어요. 그런데 씨름 선수 출신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힘은 세지만 상대를 때려본 경험이 없어서 경기할 때마다 잔뜩 두들겨 맞곤 했어요. 그런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내 인생과 참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캐릭터를 만들게 된 겁니다. 인생의 무대를 링으로 표현했어요."

-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졸업 직후에 1~2년 정도 작가 생활을 하긴 했는데, 대학 졸업 후 10여 년 정도 쉬다가 2008년에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니까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돌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했어요. 그런데 일하다가 돌에 손이 깔리는 사고가 났어요. 그래서 일을 관뒀죠. 만약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 계속 일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예술가의 운명은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내면에는 예술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예술을 하지 않으면 뭘 먹어도 배고프고 뭘 해도 만족되지 않아요." 
 
스페이스 엄에서 기자가 직접 촬영
▲ 밴드복서 스페이스 엄에서 기자가 직접 촬영
ⓒ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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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투 선수를 조각한 작품에 BMS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던데 무슨 의미인가요?

"복싱멘토스쿨(Boxing Mentor School)의 약자입니다. 뚱뚱한 권투선수 캐릭터를 계속 만들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지금은 전재구로 개명하신 이광민 복서였습니다. 제가 만든 캐릭터가 본인과 닮았다며 혹시 자기를 모델로 만든 거냐고 묻더라고요. 반가운 마음에 약속을 잡아서 만났고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BMS 이광민(전재구) 관장과 김원근 조각가
▲ 순정 가득한 두 사나이 BMS 이광민(전재구) 관장과 김원근 조각가
ⓒ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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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모습과 달리 이광민 관장님의 눈빛이 매우 선량하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말씀을 들으니까 제 작품을 '조폭(조직폭력배) 조형물'이라고 언급했던 뉴스가 생각납니다. 몇 년 전에 춘천에 작품을 설치했는데, 조폭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이라며 여기저기서 뉴스가 나왔어요. 그런 뉴스를 보니까 아주 속상했습니다. 생긴 게 거칠다고 조폭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런 뉴스가 나온다는 건 제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 작가님은 왜 예술을 하시나요?

"어느 날, 작업실에 찾아온 후배가 같은 질문을 던졌어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물론 유명해지고 싶고 돈 벌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죠. 세계적인 거장이 돼 명성을 얻는 것도 좋겠죠.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와서 일주일 동안 고민했어요. 고민 끝에 제가 찾은 정답은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는 겁니다. 제가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고 싶은 거죠. 사람들한테."

- 해외 심포지엄도 자주 다니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계기가 있나요?

"제일 먼저 참여한 곳이 러시아 심포지엄이었어요. 영어가 잘 안 돼서 처음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냈어요. 하지만 매일 저녁 작가들이 세 명씩 돌아가면서 브리핑을 하는 일정이 있었어요. 영어의 한계 때문에 정말 간단하게 화면을 띄워놓고 작품을 소개했는데 반응이 뜨거웠어요. 당시 한국에서는 무명 작가였는데 먼 이국땅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니까 울컥했습니다."
 
김원근 조각가가 참석한 러시아 심포지엄
▲ 러시아 펜자 국제 조각 심포지엄 김원근 조각가가 참석한 러시아 심포지엄
ⓒ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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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에는 인도 심포지엄도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도 우따라얀 국제조각 심포지엄 아트 디렉터의 초청으로 1월 8일부터 2월 4일까지 진행되는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했어요.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기분으로 인도로 떠났어요. 짧은 기간이지만 인도에서 지내면서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도 없고 동물,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든 길 위에서 자유롭게 오가는 인도를 다녀오고 나니 마음이 참 겸손해졌어요. 각자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인도에 다녀와서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열 배쯤은 착해진 기분입니다. 그게 몇 달 못 가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 (웃음)"

- 인도에서 얼마나 멋진 작품을 만드셨을지 궁금합니다.

"작품을 일차적으로 마무리해놓고 왔지만 청동 캐스팅 작업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채색이 돼 있긴 한데 이건 청동이 아닌 플라스틱 위에 채색한 겁니다." 
 
인도 우따라얀 국제 조각 심포지엄, 플라스틱 위에 채색을 마무리한 상태의 조각
▲ 화양연화 인도 우따라얀 국제 조각 심포지엄, 플라스틱 위에 채색을 마무리한 상태의 조각
ⓒ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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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인들은 대형 조각품을 만드는 과정을 상상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작품이 완성되나요?

"먼저 흙으로 실물 크기의 작품을 만듭니다. 다 만들고 나면 석고 캐스팅 작업을 합니다. 석고 틀을 만든 다음 거기에다가 FRP 수지로 다시 캐스팅 작업을 합니다.

어릴 때 미술 시간에 석고로 손 모양 만들었던 거 기억나시죠? 그런 방식으로 석고 틀을 만든 다음 단단한 재료인 플라스틱으로 다시 틀을 만듭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플라스틱을 조립해서 완성품을 만듭니다.

마지막 단계는 청동으로 틀을 다시 뜨는 건데 청동 작업은 시간이 좀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그건 내년 겨울에 다시 하기로 했어요. 일단 지금은 플라스틱 틀 만드는 단계까지 해둔 거죠.

그런데, 플라스틱 틀만 따로 세워두면 색깔이 예쁘지 않아요. 내년에 돌아가서 청동 틀을 마무리할 때까지 플라스틱 상태로 전시를 해둬야만 하는데, 그 상태 그대로 완성품처럼 전시를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플라스틱 틀 위에 채색만 해뒀습니다."

- 작가님의 캐릭터들이 가진 순정과 진심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 주변에 계시면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지인의 소개로 전주에서 일하시는 형사님을 만났습니다. 혹시 형사님께 누가 될지도 모르니 그냥 박 형사님이라고만 해둘게요. 순탄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한 밑거름으로 승화시키는 분입니다. 본인의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서 누구든 힘든 사람을 돕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 권투선수 시리즈를 만드셨듯이 이 형사분을 캐릭터로 작품을 만들 생각이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박 형사님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는 작가 생활을 하면서 나의 작품, 나의 인생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있었을 뿐 실천은 안 했죠. 그런데, 그런 마음을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는 남자를 만나니 정신적인 모티브가 생긴 느낌입니다.

직업이 형사인 캐릭터가 아니라 그분들처럼 세상을 향한 순정과 진심을 가진 그런 남자 이야기를 만들 생각입니다."

- 형사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작가님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을 한 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제가 그렇다고 감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진심남이 되고 싶습니다. 항상 진심을 다하는 사람. 진심 아니면 말하지 않는 남자. 진심을 담아 조각하는 남자요."

- 전시회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메종바카라서울'에서 열리는 'Traditions in Harmony II: Baccarat Meets Korean Contemporary Art'라는 전시회에 한국 현대 미술 작가 8인이 참여했습니다. 저도 그중 한 명이고요. 그곳에 제 작품 <순정남>이 전시돼 있습니다."
 
앞에 전시된 크리스탈 화병은 '아이 베이스 오발(EYE VASE OVAL)'
▲ 순정남 앞에 전시된 크리스탈 화병은 '아이 베이스 오발(EYE VASE OVAL)'
ⓒ 바카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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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들고 짝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를 형상화한 김원근 작가의 <순정남>은 크리스탈 브랜드 바카라의 부티크 스토어인 '메종바카라서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Ryo의 작품
▲ 순정과 진심 일러스트레이터 Ryo의 작품
ⓒ 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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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이후 기자의 개인 SNS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태그:#김원근, #진심남, #조각가, #순정남, #바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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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원작자의 글을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시키는 직업적 특성을 살려 다양한 형태의 예술 작품을 알기 쉬운 언어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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