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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 박인호 어록비
 춘암 박인호 어록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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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7일 선생의 출생지인 충남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1구에 각계 인사와 주민·교인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춘암상사 박인호 유허비〉가 제막되었다. 비문이다.

근세 조선의 기운이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조를 지탱해준 유교적 도덕이 통제력을   잃어 국민정신은 해이해지고 산업은 위축되었습니다.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권신의 횡포는 무소불지하고, 향반의 수탈과 류적의 행패는 그 도를 넘어 국민들은 생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이때에 영남의 수운 대선사 최제우께서 창생을 구하려 인내천 종지의 동학을 창도하시니 새 시대의 희망이라 믿는 교도가 구름같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해월노사 최시형의 명에 따라 호남의 전공 봉준이 제폭구민과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동학혁명의 횃불을 들어 고부에서 기포하니 그 세 기름에 불붙인 듯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습니다. 이때 호서에 한 위인이 있어 그 분이 바로 이 자리에서 나고 자라 온 민족의 귀감이 되신 박공 인호이십니다. 

공이 가신지 반 백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공의 위엄을 밝히고 추모하여 후학의 지남으로 삼고자 비를 세워 그 공을 기리는 바입니다.

공은 1855년 밀양인 박공 명구와 온양 방씨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천성이 총명성실하시고 담력이 남달리 건장하셨으며 부군의 근엄하시고 방정한 덕성에서 나온 가규를 이어받아 10년을 하루같이 의관을 불해하시고 어육주초를 단절하시며 낫자루를 베개하시어 와신의 지성으로 돈공하였습니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생각하는 바가 없으셨고 한 번의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고자 하는 바가 중도에서 그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만인의 장이 되실 품격을 닦으셨던 것입니다. 29세에 보국안민의 큰 뜻을 품고 동학에 입도하셨고 41세에 제폭구민·척왜척양의 일념으로 덕포 7천 동학군으로 충청도에서 기포하시니 그 세 5만을 넘어 충천하셨습니다. 허나 막강한 일병과 여천의 승전옥 예산의 신예원 검정을 마지막으로 후일의 기약을 안고 출사의 기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세의 개입으로 갑오혁명이 좌절되자 1904년에 의암성사 손병희의 밀명에 따라 갑진혁신운동을 전개하는데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그후 의암성사 손병희를 모시고 민족항쟁의 대장정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모든 일을 한치도 어김없이 성사의 지도를 받아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현도하고 교단을 정비하는데 지대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이에 교세가 3백만이요 대교구가 36개소요, 교구가 수백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종학원을 세워 교역자를 양성하시고 성미제도를 만들어 인적, 물적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또한 계몽  사업의 대종은 육영만한 것이 없음을 깨달으신 의암 성사의 명에 따라 공은 보성전문학교, 보성중학교, 보성소학교를 인수경영하고 동덕여학교와 경향에 유명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재정에 허덕이는 수십의 학교에 보조금을 주셨습니다.

한편 문자 매체의 대중화에 힘쓰셨고 만세보를 발행하는 등 대중교화에 힘써 내 것을 찾고, 갈고, 가꾸고, 지키는 의식을 키우는데 만반을 기하셔서 민족자존의 역사적 과업에 정진함으로써 민족종교의 기틀을 다지고 과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공의 역량이 온누리를 뛰어넘으니 54세에 천도교 대도주로 승통되시어 새로 펼쳐지는 민족개화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공은 거교적인 역사로 그 임을 자담하시니 그 조직과 교인들이 출력하는 막대한 자원은 때를 얻어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에 활력소를 불어넣은 것입니다. 이에 1919년의 3.1운동에 앞장섰던 공은 48인의 한분으로 피검 되어 옥고를 치르셨고, 출감 후 계속 사회개혁과 독립운동을 음양으로 지도하시어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당시 <개벽>을 발간하여 대중 교화에 힘썼고 <농민>을 발간하여 농촌계몽에 힘썼으며 <어린이>를 발간하여 민족개조의 대역사를 소리 없이 진전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공은 한 번 손을 댄 일이면 어떠한 경우라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3.1운동에 실질적인 역사를 맡았던 공은 그 생이 다할 때까지 민족을 위한 굳은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셨습니다. 신간회가 창설됨에 그 아들 래홍씨를 독립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아픔도 겪어야만 하셨습니다. 무인멸왜기도는 일제침탈에 대한 민족최후의 항쟁이라 할 때 공의 진면목이 여실히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때는 1936년 일제의 폭력이 극에 달하여 거의 대부분의 애국운동가들이 체념상태로 있을 때에 공은 전국 교인에 밀령을 내려 일제의 멸망을 기도케했습니다.

이 운동은 2년 후 왜경에 탄로되어 많은 교도들이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조선의 독립이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러하니 항쟁은 더 처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해 적당히 처리되어 그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라 위해 평생을 바친 공은 1940년 4월 3일 86세를 일기로 환원하시었습니다. 공이 가신 지 5년 일제는 망하고 조국은 광복이 되니 공이 전개한 멸왜운동은 실로 비장한 역사적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식어가는 광복의 의지를 소생시켰던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선열의 유훈을 명심하고 구천에 계신 공의 혼령을 위로하면서 새 역사 창조에 정진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서기 1985년 5월 7일 11시
백산 이 상 재 짓고
정봉 김 영 덕 쓰고
천도교중앙총부 후원
춘암상사 박인호 유허비 건립추진위원회 세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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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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