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어플 내 모바일 번호표
백세준
'와, 정말 좋은 기능이네?'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점심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 번호표를 발급받아 두었다. 점심시간이 딱 되자마자 나는 밖으로 튀어나갔다. 은행으로 갔더니 은행 창구 담당자분 몇몇도 점심을 드시러 갔다는 푯말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나는 아직 순서가 남아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앞 손님들이 점차 빠지고 내 차례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던 중 같이 의자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눈에 띄었다. 그분은 분명 내가 오기 전부터 있었고, 손에는 종이 번호표를 들고 계셨다. 그런데 다음 순서는 내 차례가 아닌가?
작은 기계 모니터에 빨간 전자 글씨로 내 번호와 함께 화살표가 뜨는 것을 확인한 나는 창구로 향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계속 그 어르신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분명 내가 늦게 온 게 맞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단 나는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을 처리를 해야 하므로 은행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때 빼먹은 서류들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대출한 은행에도 서류가 잘 들어갔는지 확인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서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어르신은 아직도 앉아 계셨다. 내 다음 순서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은행에 방문한 사람들 중 꼬깃꼬깃한 종이 번호표를 들고 있는 사람은 어르신밖에 없었다.
그 은행 주변에 회사 건물이 많아 대부분 직장인이었고, 이들은 휴대폰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나이대였다. 그러니 나처럼 은행에 방문하기 전에 미리미리 모바일 번호표를 발급받아두었던 것이었고, 그 사람들은 자기 순서가 다가올 때쯤 맞춰서 온 것이다. 어르신은 계속해서 기다렸던 것이고.
디지털 약자를 위한 '배려 창구' 필요
키오스크가 식당을 지배해 이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화제가 된다. 주문을 포기했다는 사람, 어렵게 누르며 다음 단계로 넘어갔지만 마지막에 '처음으로'를 잘못 클릭했다는 사람 등 다양하다.
기계가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고 그것에 적응하라는 것은 어쩌면 '폭력'일 수도 있다. 한평생을 기계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교육을 몇 시간씩 받는다고 한들 상황은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까.
가령, 마트의 셀프 계산대에서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어르신에게 셀프 계산대 한쪽에 아직 계산하지 않은 물건을 올려두고, 물건 하나하나 바코드를 찾아가며 찍고, 계산된 물건을 올려두는 곳에 모두 올려둔 후 결제를 한 뒤에야 카트에 실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가르쳐 드려도 힘들 것이다. 요새 이러한 디지털 교육이 많지만, 실제 어르신 혼자 현장에 가면 하지 못한다(교육할 때는 옆에 강사가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도 있다).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 약자 배려석이 있는 것처럼, 식당이나 은행 등에도 기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 창구가 있다면 어떨까? 그럼 기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기계에서 주문해 배려 창구를 항시 비워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려 창구에서 볼 일을 보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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