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시민사회단체 활동 중인 박중기 선생.
4.9통일평화재단
"전태일의 이야기 중에 '나에게 대학생 친구만 하나 있었더라면 내가 근로기준법이 어떤 것인지 알았을 텐데' 하는 대목이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 거 같아요. 전태일이 스무살이었잖아요. 저 어린 노동자마저 분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4.19까지 경험했던 우리들이 가만히 있어도 되겠느냐 하는."
1차 인혁당 사건이 196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1974년에 발생했다. 1차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른 박중기 선생은 이후 맏형 격으로 활동했고 서울에서 동료들과 후배들을 돌봤다. 정확히 그 중간쯤 되는 시기, 전태일 열사의 사망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드리웠다. 박중기 선생을 비롯해 고작 30~40대였던 선생들도 마찬가지였을 터.
이를 전후한 박중기 선생의 구체적인 활동은 어떤 양상이었을까. 이 실장의 설명에 따르면, 5.16 쿠데타 이후 박중기 선생은 도망자 신세가 됐다. 앞서 4.19 당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전국위 청년부장을 맡았다. 그에 앞서 부산지역 진보 청년운동단체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 서울맹부에서 투쟁국장을 맡았다.
이승만 정권에서도 편치 않은 삶이었건만 4.19와 5.16 이후에도 한국 사회 변혁 운동에 투신하며 정권의 눈엣가시 같은 활동을 이어갔다. 박중기 선생은 고3이던 1954년 부산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김금수 선생을 통해 만난 인혁당 희생자 이수병 선생 등과 만든 사회과학독서동아리 '암장'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청년 시절을 온통 한국사회의 변화와 변혁에 몸 바친 셈이다.
"군사 쿠데타 이후 2년 정도 지나면 박정희가 민간인들한테 정부를 이양한다면서 정치 활동이 금지됐던 사람들을 풀어주는 과정이 있었어요. 선생님도 그때 사회에 복귀하셨죠. 아마 제 생각이고, 선생님도 종종 얘기를 하시곤 했는데요. 군사 쿠데타로 세워진 박정희 정권이 불의하다고 보시고, 4.19와 같은 과정을 통해 이 불의한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워야겠다는 뜻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향후 2차 인혁당 사건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분들과도 '학생들은 이렇게 들고 일어나고 있고 이들을 정부가 최루탄이며 곤봉과 군홧발로 짓밟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했으면 좋겠느냐'는 과정을 거치셨던 거죠. 그러다 중앙정보부가 개입돼서 고문을 가하고 조작을 거친 조작 사건이 1차 인혁당 사건이고요."
박중기 선생은 그로 인해 1년 형을 받았다. 재판 과정만 1년이 넘었다. 대법원 판결이 나서 바로 석방이 됐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했다. 빨갱이란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수감 생활 전 거쳤던 기자 일도 그만둬야 했다. 결혼도 했고 자식들도 생겼기에 경제 생활은 필수였다. 잠시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지들과 신촌에서 목재상도 경영했다. 그러다 전태일 사건을 맞닥뜨렸다.
박중기 선생과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대학생들도 세력을 형성했고, 소위 말하는 민청학련 사건에 주축으로 가담했던 이들이 그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박중기 선생과 동지들도 어떻게든 연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정권을 전복하고자 하는 과격 시위로 만들고 인혁당 가담자들을 배후로 몰았던 것처럼,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박중기 선생을 비롯한 여럿이 지목됐다. 말 그대로 운명의 장난이었다.
"그래서 다시 감옥에 가셨어요. 당시 서울대 유인물 사건이 터져요. 그 때문에 6개월 가량 옥살이를 하시게 됩니다.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했던 무리들은 본인들이 조작하려는 간첩 사건의 일정에 박 선생님이 감옥에 가 있었으니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였죠."
"미안하다, 후배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