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 농민항쟁 사적비
암태도 두번째 대지주였던 천후빈은 소작인들의 인심을 얻었다.
박만순
지서 근방 창고에 구금되었던 S가 지서 마당으로 끌려 나왔다. 잠시 눈을 감은 그는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5년간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은 잠시였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세상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특히 서북청년회가 암태도에 들어오면서 농민항쟁의 전통을 갖고 있던 섬은 나락으로 치달았다. 서청은 좌익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면 소재지의 사장에 주민 100여 명을 모이게 했다. 모인 이들을 2열 횡대로 세워, 서로를 마주 보게 했다.
"앞에 사람 뺨을 사정없이 때려" 사람들은 주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의 나이가 비슷한 이도 있었으나 아버지뻘, 할아버지뻘 되는 이도 있었고, 여성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뺨을 어떻게 때린단 말인가! 그러자 서청 책임자가 한 노인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노인의 몸뚱어리가 공중에 붕 뜨더니 팩 고꾸라졌다.
그렇게 두세 차례 시범을 보인 후에는 주민들 간의 뺨 때리기가 격화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이성(理性)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S는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예비검속되었다. 암태지서와 목포경찰서를 경유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쟁 직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었는데, 이와는 달리 일부 인사들은 반정부인사라는 혐의로 예비검속되었다. 즉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격리시키겠다는 의도로 붙잡아 들인 것이다. 여기에 S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인민군의 남하에 급작스럽게 후퇴하던 군경이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을 학살했는데, S는 천만다행으로 살아났다. 암태도로 돌아온 그는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3개월 만에 상황은 역전되었고,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이 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랴' 라는 심정으로 하늘을 잠시 바라본 그는 경찰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나의 부모·형제는 나와 사상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에 나는 죽여도 상관 없지만 부모·형제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라" 또 그는 "내가 당신들에게 하나라도 해코지를 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경찰들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은 굽히지 않되 가족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 S는 1950년 11월 암태도 고산 건너편 바닷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똑같이 군경에 의한 학살이었지만 앞의 박아무개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인민군 옷으로 위장한 백부대
6.25가 발발한 지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4일 목포가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런 직후 무안군이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하지만 인민군이 무안군의 각 섬에 진주한 것은 아니어서 전쟁을 겪은 이들 대부분은 인민군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짧은 인공생활을 뒤로 하고 목포가 그해 10월 2일 수복되었다. 하지만 무안군(현재의 무안군과 신안군)은 금방 치안이 확보되지 못했다.
현재의 신안군 대부분이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수복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이다. 목포에 진주했던 해병대 백부대가 현재의 신안군 임자도를 수복한 것은 10월 19일이었다.
각 섬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완장 찬 이들은 무안을 거쳐 함평군 군유산과 영광 불갑산으로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그런 상황에서 1950년 10월 4일 석양 무렵 백부대 1개 소대가 비금도로 향했다. 전쟁 전 목포와 비금도 사이를 오가던 남영호를 탄 백부대는 원평항에 상륙했다.
희한한 건 한국군 백부대가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을 했다는 점이다.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환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을 빨갱이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른바 함정수사였다.
원평항에 상륙한 군인들은 당시 면사무소가 있었던 덕산리 덕대로 이동하여 국군의 배지를 뒤집어 단 채 불을 켜고 마을을 다니면서 주민들을 마을 앞에 집결시켰다.
주민들은 군인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채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에 집결하였고, 노〇〇의 할아버지 노장석을 비롯하여 아버지 노상길, 숙부 노충길 등 가족도 집결하였다.
배지를 거꾸로 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인민군이 아닌 것을 눈치챈 한 청년은 백부대원의 "신촌에서 동무들이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니 데려오라"고 한 심부름을 자원하여, 그길로 도망쳐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금면사무소 앞에 모인 이들은 백부대가 인민군인 줄만 알고 태평스럽게 있었다. 어떤 술 취한 이는 춤을 추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면사무소 앞 민가를 개조한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경찰에게 학살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신안광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2010)
성기를 잘라 죽이고, 톱으로 썰어 죽이고,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이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 이들을 죽인 일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였다. 1950년 암태도와 비금도에서 있었던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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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사람 성기 자르고... 끝나지 않은 죽음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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