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형무소에 수감되었때의 박원근
박만순
보은군 보도연맹원은 약 200명이었는데 사무실은 군청 앞의 식량영단 건물이었다. 간사장은 송철헌이었고, 과거 남로당 간부였던 이들이 보도연맹 간부를 맡았다. 보도연맹원들은 6.25 전쟁 전 정기적인 소집을 통해 반공교육을 받기도 했다.
사찰계에서는 보도연맹 간부들을 불러 사상 전향 방법 등에 교육을 실시했다. 신아무개는 각 면으로 출장을 가 보도연맹원 조직 확대 사업을 점검했다. 지서 경찰들은 마을에 직접 나가 "우리가 너희들을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고 경찰과 함께 협력해서 대한민국의 역군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며 조직 확대를 꾀했다.
한국전쟁 전 보도연맹원들에게 '대한민국의 역군이 되게 해 주겠다'던 약속은 정작 전쟁이 터지자 휴지쪼가리가 되었다. 전쟁이 나자 육군 G-2대원 10여 명이 보은으로 와 수리조합 사무실을 본부로 삼아 보도연맹원들을 심사했다. 당시 보은군 보도연맹원 명부는 충청북도 경찰국, 보은경찰서, 보도연맹 사무실에 있었는데, G-2 대원들이 보도연맹 사무실에 있던 명부를 압수해, 살생부 작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피의 제전'을 위한 기초작업이 마무리되었을 때 2사단 16연대 헌병대가 보은에 도착했다. 보은경찰서와 마로지서 등지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이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갔는데, 보은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보은면 길상리(일명 미륵뱅이)로 향했다. 경찰서에서 4km 떨어진 곳이었다.
지금은 장례식장이 들어선 자리에 보도연맹원 약 50명이 세워졌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는커녕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헌병대의 지휘 아래 군경의 총구가 보도연맹원들을 겨냥했다. 50명이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아주 잠깐이었다. 그런데 그 주검 중에는 보도연맹원이 아닌 이가 있었다. 박원근이었다.
청춘을 민족해방운동에
아버지 박치호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박원근((1912년생)은 보은 삼산국민학교를 나와 서울로 유학을 했다. 1927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1930년 3월에 퇴학당했다. 이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보인다. (진실화해위원회, '박원근의 항일독립운동의 건', 2008)
박원근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퇴학한 다음 해인 1931년 12월 말 삼인회 사건으로 본정(本町)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공산주의 제도의 실현을 목적으로 조직된 '삼인회'는 삼인(三仁), 신로(新路)를 비밀리에 출판해 회원 등에게 배부했다.
곧바로 석방된 그는 삼인회의 지하활동을 하며 하야사카(早板)인쇄소 동맹파업을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1932년 9월 7일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경성지방법원 예심청구서에 나와 있는 박원근의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고, 혐의 사실은 삼인회가 사유재산제도 부인, 착취가 없는 자유·평등한 신사회 건설, 즉 공산주의 사회제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단체인 줄 알면서 가입했다'는 것이었다.
박원근은 1934년 1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판결을 받았다. 오랜 기간의 감옥생활로 고초를 겪었지만 박원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의지는 식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1931년)과 중국 본토 침략(1937년)으로 국내 민족주의자들의 사상 전향과 독립운동 포기가 붐을 이룰 때, 그는 세파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고등외사월보에 따르면 '박원근은 중일전쟁이 반드시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고, 공산주의 운동을 실현할 날이 다가왔다'고 확신했다.
박원근과 그의 동지들은 항일 비밀 결사체 '신인구락부'를 조직해, 반전사상과 지원병제도 반대를 선전하고, 일본이 패전할 것임을 역설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으로 검거되어 1941년 10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세력의 주류를 형성했다. 박원근 역시 청춘을 경찰서 유치장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식민지 시절 내내 항일독립 운동에 애를 쓴 박원근은 해방 후부터 정치·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뒀다. 가정생활에 몰두한 그는 그렇다고 자신의 젊었을 적 꿈꾸었던 가치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즉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바친다'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던 그가 6.25가 나자 왜 보은경찰서에 예비검속되었을까? 사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의 경찰서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향하지 않은 사회주의자나 좌익세력을 모두 제거(학살)할 계획아래 예비검속했다. 보은에서는 그 타킷이 박원근이었고, 그는 보은군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길상리에서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청춘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이가 너무도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가 꿈꾼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도 1950년 7월 15일 보은군 보은면 길상리에 묻혔는지 모른다.
풀리지 않는 부부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