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조성국 선생님 흉상 제막식 사진. 오른쪽은 마당극에 등장한 문호장 탈이다.
오창환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영산면 놀이마당으로 갔다. 8시에 일봉 조성국 선생님(1919~1993) 흉상 제막식이 있기 때문이다. 영산 출신인 조 선생님은 교사이셨으며, 양파 재배를 지역에 뿌리내리게 한 농업인이었고 잊혀 갔던 영산줄다리기를 복원시켜 진정한 공동체 잔치로 자리 잡게 한 분이다. 영산 줄다리기 초대 기능 보유자셨다. 스스로 농군, 줄꾼, 술꾼을 자처하며 젊은 대학 문화패와도 잘 어울리셨다. 또한 민예총 초대 공동이사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제막식을 끝내고 '마당굿 운동 50년 기념 민족예술 대동굿' 선포식이 끝난 후에 기념 공연으로 부산 극단 자갈치 중심으로 마당극 <영축산 빗돌말이 들배지기 한판>을 하였다. 이 공연은 채희완 선생님이 30여 년 전에 쓴 극본을 리바이벌 한 것인데, 이 지역 민중의 수호자 문호장(文戶長)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문호장은 성만 전해지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호장은 당시 지방직 벼슬을 말한다. 그는 약 370년 전 현재 만년교 부근에서 살고 있었으며 무술과 도술에 능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관찰사 일행이 탄 말이 일하는 농부들 밥상을 밟아버리고 말았다. 이를 본 문호장이 그 말의 네 발을 땅에 붙여버렸다.
화가 난 관찰사가 문호장을 불러다 문초를 하는데 곤장을 치면 볼기에 닿기도 전에 부러져 버렸고 시뻘겋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지지려 해도 얼음덩이가 되어 떨어질 뿐이었다. 화살을 쏘았으나 문호장의 앞에 닫기도 전에 공중으로 치솟아 버렸다. 총을 쏘니 총알 대신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관찰사가 문호장을 먼 곳으로 압송시켜서 그곳 옥에 가두라 했으나 문호장은 분신술을 부려 이곳저곳에 나타났다. 결국 관찰사는 문초를 포기하고 그를 불렀다. 그런데 이때 문호장은 문득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관찰사에게 삼나무 가지로 자신의 겨드랑이를 치라고 한다.
그러자 문호장이 죽어버렸다. 관찰사는 뒤늦게 영웅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문호장이 청했던 대로 매해 단옷날 그를 위한 제를 올리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영산향토지 397쪽/영산사적보존회 발간 참조).
당시 지방 관리인 호장(戶長)은 세습되는 벼슬이었는데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던 문호장은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관찰사와 다툼을 계기로 자신이 죽을 자리를 정한 것 같다. 현재 문호당 사당은 영축산 중턱의 영명사 내에도 있고 영산시장 공영주차장 뒤에도 있다. 매해 단오에 문호장 굿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