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 감영복원된 전라 감영. 선화당이 보인다.
이영천
이경직의 조치에 군중이 분개한다. 손천민 등 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만 명이 전주로 몰려가 감영에 압력을 행사한다. 더는 속지 않고 원한과 억울함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농민의 주체적 실천이다. 이를 남접이 주도한다. 대규모 군중에 놀란 이경직 역시 조병식처럼 아무런 효력도 없는 답서를 내준다. 무능한 권력 집단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다시 확인하는 장면이다.
소장을 내고, 수만 도유(道儒)가 물러가지 아니하고 전주 부내(府內)에 머물렀다. 9일이 되자 감사 이경직이 또 전과 같은 회답을 주었으나, 그도 하는 수 없이 각 고을에 관문(關文=지시문)을 발송하며 내용에 "동학은 조정이 금하는 바라 각 고을이 마땅히 법에 따라 금해야 함에도, 지금 들어보니 각 고을 수령들이 금단(禁斷)을 빙자하여 돈과 재물을 탈취할 뿐만 아니라 인명을 상해(傷害)함에 거리낌이 없다 하니, 법에 따라 어찌 이런 일을 용서하리오" 하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44∼145. 의역하여 인용)
11일에서야 관문이 발송된다. 살을 에는 엄동설한 11일을 벌판에서 버틴 것이다. 그 힘은 무엇보다 수탈을 벗어나려는 열망과 감영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 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썩은 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의지가 이처럼 삼례에 모인 민중들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교조 신원으로 모든 문제의 해결을 원했던 농민은 이경직의 처분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단은 이 정도에서 타협하고, 집회를 정리하려 한다. 농민의 열망은 뒷전이다. 손천민 등이 이경직의 유화책에 순순히 응하고 만다. 11일간의 항쟁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강경한 남접과 온건한 교단이 나뉘는 시작점이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동학은 일원화한 지휘체계로 권위가 있었다. 외형상 남접도 순순히 응한다. 또한 강경 일변도로 끌고 가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수만이 먹고 자는 문제 등 물리적 여건도 고려해야 했다. 이에 삼례집회는 외형상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만다.
명망가 몇이 공주집회를 주도했다면, 삼례집회는 수탈에 지칠 만큼 지친 민중이 주축이었다. 삼례집회에서 손화중, 김덕명, 김개남, 전봉준 등이 남접의 주요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집회 이후
근본에서 변혁을 도모하려 했던 남접은, 삼례집회를 통해 구조적 모순을 깨닫고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양도(兩道) 감사의 처분에도, 각 고을 수령의 수탈은 그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한다.
매관매직으로 수령 자리를 꿰찬 자들은, 투자금 회수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수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위직에서 고위직뿐 아니라 왕비에 이르기까지 여흥민씨 일파도, 이런 수탈을 전제로 관직을 팔아먹었다는 게 일반화한 인식이었다. 설혹 왕이 '동학을 핑계로 수탈을 금하라' 명령하여도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