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공북루금강에 면한 공북루와 공산성 생활터전.
이영천
서장옥은 평소 눈에 잘 띄지 않다가, 국면의 전환점이나 일의 전개에 커다란 희생이 필요한 정점에 홀연히 나타나 솔선수범하는 실천을 통해 큰 방향을 정해준 인물이다. 전봉준과도 교분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혁명 과정에서 전술·전략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혁명의 방향성을 명징하게 제시한다.
반대로 서병학은 부유한 양반 출신으로, 보은 집회 후 배신하고 변절한다. 2차 봉기를 전후해 토벌군에 항복하여 오히려 정찰과 도인을 색출·파괴하는 역할을 스스럼없이 자행한다. 지금도 서병학 같은 군상들이 나라를 경영해 보겠다고 설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이두황과 성하영은 전투와 관계없이 경기·충청 일대에서 무수한 양민을 학살했다. …(중략)… 서병학이 길잡이 노릇을 한 것이다. 공주전투에서 농민군이 패전하자 한패는 남쪽으로, 또 다른 한패는 동북쪽으로 달아났다. 손병희는 최시형을 보호하며 전라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상해서 영동 지방을 거쳐 보은 땅으로 들어갔다. 이때 경리청의 구상조는 영남의 일본군과 합동작전을 펴며 이들을 추격했다. 당시 서병학은 경리청 참모관으로 청산, 옥천, 영동 지방에서 길잡이를 했다. 그는 예전에 목숨을 걸고 모시던 최시형과 죽음을 두고 맹세하며 뜻을 같이하던 손병희를 잡기 위해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파랑새는 산을 넘고. 이이화. 김영사. 2008. P32~33)
또 다른 무리는 왕비가 총애한 무당 진령군 눈에 들어 고위 관직에 앉은, 조병식이나 전라 관찰사 이경직 같은 자들이다.
조병식의 탐학도 조병갑 못지않았다. 둘은 사촌 간이다. 조병식은 왕비 밀명으로, 임오군란 후 청나라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감시하기 위해 톈진에 다녀오기도 했다. 또한 함경도 관찰사일 때 흉년을 핑계로 방곡령(防穀令)을 내려 일본으로 곡물 유출을 차단했다가, 조약위반이란 일본 항의로 11만 원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한 장본인이다. 이런 대형 사고를 일으키고도 파직을 면한 건 오로지 왕비에 기생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공주 집회를 통해 침탈 극복이라는 목표를 이루진 못했으나, 관찰사가 각 군현에 '동학을 금단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폐단을 일절 금지 하라'는 공문을 얻어낸다. 이는 탐관오리가 공공연하게 자행하던 수탈에 대한 명백한 금지 명분이 되어 준 셈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민중의 행동과 저항 방식은 무척 현명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면서, 정치 의식을 고양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