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후퇴와 방어지역
김영희
한국전쟁 발발 이후 밀양지역은 "국군이 방어에 성공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밀양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들은 밀양경찰서 및 관할지서 경찰과 경남지구(CIC)에 의해 연행되거나 소집, 통보받고 자진 출두 후 옛 삼랑진 면사무소 건물, 삼랑진 지서, 삼랑진역 홍익회(전신 강생회)지하창고 등에 구금됐다가 1950년 8월 중하순경 삼랑진읍 미전고개, 안태리(동촌마을) 송지리(죽곡마을), 검세리(작원관지), 청도(곰티재) 등으로 끌려가서 고귀한 생명들이 억울하게 집단 학살을 당했다.
밀양지역은 대략 1차례부터 5차례 학살을 자행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학살지마다 상세히 조사해 보면 학살책임자들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드문 일 중 하나다. 또한 학살책임자의 직책 중 눈에 띄는 단어가 나온다. "해군CIC, 해양공사, 해군헌병대" 등 해군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 의외이다. 아마도 낙동강 하류 "작원관지 수장" 피학살자가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밀양지역 여러 자료와 답사한 결과에 의하면 피학살자가 820여 명 이상 추정된다. "증언자 이정우는 삼랑진읍에 살았기 때문에 '전역 학살지'의 학살 인원을 가름하기 어렵지만 보도연맹원들 기차에 태워서 데리고 왔다면 인원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밀양 사람뿐만 아니라, 덕산, 진영, 한림정, 낙동강, 삼랑진역을 거치면서 역마다 태웠을 가능성 배제할 수가 없어요.(주1)" 라고 한다.
1차례부터 5차례 학살지를 소개하기 전에 밀양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약산 김원봉\을 언급하고 민간인 학살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밀양역사 중 근현대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약산 김원봉 네 형제가 약산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몇 차례 경찰서에 끌려가서 학살된 사건을 다루기 이전에 독자 여러분들이 잘 알고는 있겠지만 약산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부장관) 등으로 활동했던 일제하 반일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필자는 2012년부터 약산 김원봉과 그 외 항일독립운동사 관련해 역사 교사들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가 주관하는 중국 항일독립운동사 답사를 몇 차례 다녀왔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의 오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약산은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가로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민간인학살 밀양 편 준비하면서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약산의 네 형제가 학살된 사연을 접하게 된다.
2021년 추석 전부터 밀양 유족들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한 분은 뇌종양으로, 한 분은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약간 불안했다. 경남유족회장께 소식을 여쭸더니 아마도 돌아가셨을 것 같다고 한다. 이제 겨우 두 지역을 준비 중인데 유족들의 사망 소식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진다. 유족분들이 연로하셔서 증언이나 만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양영철(88) 밀양유족회장의 마지막 증언이 필자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내가 죽고 나면 이 진실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보는 기라, 밀양에 대해서는!(주2)"
이 말씀을 되새기며 진실을 밝혀보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밀양지역 답사는 유족분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셔서 동행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일반인 두 분을 섭외했다. 이정우(전직 공무원) 증언자와 이준설 밀양 의열기념관 학예사다. 두 분과 2021년 9월 13일, 16일 양일간 밀양답사를 시작했다. 13일 1차 학살지 미전고개 역사적 진실 현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