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봉마을정읍 감곡면 계룡리 관봉마을 노인정 옆 빈 곳이 전봉준 생가로 알려진 터다. 이곳에 살던 당시 원평의 혁명세력과 두터운 교분을 쌓는다.
이영천
동곡리 지금실은 다름 아닌 동학의 또 다른 축이 되는 김개남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서 둘은 서로를 존중하는 막역한 사이가 된다. 김개남의 중매로 전봉준 딸이 혼인하여 동곡리에 살았을 정도로 가까웠다.
전봉준과 김개남의 갈등을 부각하는 연구가 있기도 하나, 이는 여러 요소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읽힌다. 일례로 혁명 전술과 전략에 대한 차이, 혁명군 간 역할 분담, 청년 시절 둘의 관계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보인다.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아버지 전창혁은 잔반(殘班) 혹은 향반(鄕班)으로 몰락 양반이다.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했고, 어디에 살았건 서당 운영이 생계 수단이었던 듯하다. 서당 수입도 변변치 못해 약간의 농사와 보조 수단으로 약방을 겸해 운영하며 살았다.
고부 살던 때 전창혁이 향교 장의(掌議)였다는 설(說)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학문이 꽤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봉준 교육에 있어, 전창혁이 직접 가르치거나 어려운 사정에도 꾸준히 서당에 보내 공부시킨 열의도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전창혁은 매우 의식 높은 향촌 지식인으로, 전봉준의 의식과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란 짐작은 그래서 매우 타당해 보인다.
전창혁의 이러한 저항 지식인으로서 면모는 실천을 통해 전봉준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의 죽음이다. 1893년 6월경 전창혁의 죽음에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공동으로 일치하는 부분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침탈에 항거하다 모진 매를 맞아 장독(杖毒)으로 죽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