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백범기념관
'나의 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達)하려고 살 것이다.
- <백범일지> '나의 소원' 가운데
이 글은 <백범일지> '나의 소원' 편의 앞부분이다. 나는 교단생활 33년 가운데 29년을 고교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그 무렵 국어교과서에는 이 글이 줄곧 실려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나의 소원' 단원을 최소한 100번은 더 가르친 듯하다. 해마다 4학급에서 6학급의 수업을 담당했기에 20년만 추산해도 100번은 넘는다.
지금 회상해도 그때 나는 이 단원을 가르치면서 대단히 비분강개한, 때로는 그 말씀에 깊이 감동, 학생들을 가르친 듯하다. 그런 가운데 교단생활 말년에 고향 출신의 한 독립전사(허형식 장군)를 알게 된 이후, 시민기자가 됐다. 이후 백범 시해범 안두희를 10여 년 끈질기게 추적한 한 의인 권중희 선생을 만나 그 대담을 기사로 쓴 바 있다. 그때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백범암살 배후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치청(NARA)에서 가서 40여 일간 그곳 서고에 소장된 자료들을 두루 열람하기도 했다.
그 이후 아예 교단에서 은퇴한 뒤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 답사를 4차례,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답사하고자 러시아 연해주와 뤼순 일대, 그리고 일본 여러 곳과 미국 버지니아 주 남쪽 군사도시 노퍽의 맥아더기념관도 두 차례나 둘러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런저런 이야기를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와 어린이 도서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을 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