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멘 앙또냉 귀용 쥐브리 샹베르땡 라 저스티스 2018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이다.
임승수
음식을 주문한 후 와인의 코르크를 제거하고 잔에 따른다. 루비가 녹아서 액체가 된다면 이런 색을 띨까? 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니 삼나무 가구에서 날 법한 맵싸한 향이 코 주변을 맴돈다.
이 향을 유독 좋아하는 나로서는 첫인상부터 합격이다. 한 모금 마셔 보니 산도가 높지 않고 진득하다. 유독 날씨가 더웠던 2018년에 수확한 포도로 양조해서 그런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콜릿 향도 감지되고 갈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기대 이상이다.
첫 음식으로 육회 등장이다. 깍둑썰기 네모난 육회 더미에는 간헐적으로 굵은소금과 통후추 알맹이가 뿌려져 있고 바로 옆에 얇게 썰린 배가 놓여 있다. 적당한 크기로 썰려 있다는 점 외에는 인위적 개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음식.
신선하고 차가운 육회 한 점에 통후추 알맹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입에 넣어 질겅질겅 씹는다. 생고기 특유의 육향이 만발하는 가운데 통후추 알맹이가 으깨어져 화생방 가스 같은 알싸한 기운을 구석구석 퍼뜨린다.
문득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됐다는 동굴벽화의 벌건 소가 떠올랐다. 동굴에 터를 잡고 생활한 구석기인의 식생활이 이러했을까.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미식에는 군말이 필요하지 않다. 유전자에 면면이 새겨진 본능에 몸을 맡겨 저작운동에 집중하면 될 뿐. 한참 씹으니 소고기 특유의 감칠맛 뒤로 신맛이 은은하게 배어난다.
가지런히 썰린 배를 보며 속으로 한 마디 건넸다. '원래는 네가 등장할 차례인데 오늘은 귀한 분이 오셨으니 기다려주렴.' 붉은빛이 감도는 잔을 들고서는 구석기인은 그 존재를 몰랐을 게 분명한 문명의 소산물을 천천히 입속에 주입했다. 동굴 벽 이끼 같은 음습한 액체가 서늘한 육회의 질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과실 향을 품고 바닥에서부터 차오른다. 수만 년의 간극을 지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식문화가 한 사람의 구강 안에서 이런 식으로 조우할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육회의 풍미가 유전자 속 내밀한 무언가를 건드린다면, 와인의 그것은 문명을 개척한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과 수고를 떠오르게 만든다. 과거와 현대, 본능과 의식이 붉은 빛깔로 어지러이 교차하자 고개는 절로 끄덕여지고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맛있어!'를 연발하게 된다. 그렇게 한참 붉은 것들을 음미한 후 천덕꾸러기가 된 배가 가여워 한 조각 집어 들어 와삭와삭 씹는데 문득 위기감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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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주문한 음식 일체가 상 위에 차려졌고 초등학생 둘째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쾌속의 손놀림으로 거북손을 까서 먹는다. 중학생 첫째 앞에 놓인 김치메밀전병은 벌써 반쯤 자취를 감췄으며, 아내 앞의 방어회 접시는 음식이 놓인 영역보다 빈 바닥이 드러난 곳이 훨씬 넓다. 이대로 알타미라 동굴 속 정취에 넋을 잃고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일단 젓가락을 붉은색이 감도는 방어회 쪽으로 선회했다.
그렇게 해서 입속으로 투하된 회 한 점은 조금 전에 육지 것이 나뒹굴었던 장소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를 일거에 변화시킨다. 기름이 바짝 오른 방어 특유의 미끄럽고 푹신한 질감 때문에 이것이 씹히고 있는지 녹고 있는지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다.
방어회 한 점이 휘젓고 지나간 구강 표피는 마치 프라이팬 표면처럼 얇게 기름이 둘리는데, 이때 피노 누아를 주입하면 와인의 타닌이 기름기와 만나 한결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게 뭔가 부드러움의 돌림노래 같은 구석이 있어서, 앞서 다녀간 방어회의 소절을 피노 누아가 자신만의 음색으로 뒤따라 부른다고나 할까. 두 선율이 겹쳐 생성되는 화음도 훌륭하기 그지없다. 만약 부드러운 방어회 뒤로 예리하고 선명한 화이트 와인이 등장한다면 이만큼 조화를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