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라모트 브뤼샤르도네 60%, 피노 누아 35%, 피노 뮈네이르 5%를 섞어 만들었다.
임승수
잔에 따라 향을 맡고 한 모금 입 안을 적셔보니 샴페인 특유의 이스트 향기도 적당히 있고 샤르도네 비율이 높은 샴페인에서 기대할 수 있는 상큼함도 보여준다. 놀라운 것까지는 아니지만 모자람 없이 기본기에 충실하니 음식에 곁들일 용도로는 안성맞춤이다. 뽀글뽀글 올라오는 샴페인의 기포가 해변가 주상절리에 주기적으로 부딪히는 파도의 하얀 기포처럼 느껴지는 건, 층층이 부서지는 킹크랩을 먹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인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았건만 쥐 죽은 듯 조용하다. 특별한 진미를 먹을 때나 일어나는 기현상이다. 오물오물 우물우물 우걱우걱 냠냠. 누군가 살이 허옇게 붙어있는 다리짝을 앞에 놔두고서 굳이 하나 더 확보하겠다고 손을 뻗는다. 하지만 손보다 빠른 눈은 그 행위를 실시간으로 포착한다. '건들지마! 손모가지 날아가붕게'라는 영화 대사가 떠오를 만큼 강력한 제지가 이어진다. 이래저래 눈치를 봐야 하는 바깥 사회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즉각적이고 단호한 반응이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마트에서 파는 게맛살하고는 차원이 달라. 도대체 그런 가공식품에 어떻게 감히 게맛살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지?"
돌연 등장한 아내의 목소리는 대놓고 킹크랩 예찬이지만 솔직히 말해 너무 비싸서 가성비가 떨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킹크랩 주문할 돈으로 마트 게맛살을 산다면 카트에 수북이 쌓일 테니까. 하지만 우리 가족 전 구성원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성비가 아니라 하이엔드를 추구하고 있다. 부자들이야 자주 먹는 음식이겠지만, 1년에 한 번 눈 질끈 감고 먹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가성비 운운하면 좀 야박하지 않은가. 게다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문화의 발전은 대체로 가성비가 아닌 하이엔드에서 촉발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 가족은 인류 식문화 발전의 최일선에서 분투 중이다.
킹크랩 몸통은 다시 라면 속으로
한참을 게걸스럽던 두 딸은 느끼해서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수저를 놓았다. 참으로 효녀구나. 마침 함께 딸려 온 게장비빔밥이 있으니 얼마든지 먹으렴. 아빠는 샴페인 덕분에 느끼함을 모르고 게살을 무한 흡입할 수 있단다. 너희가 샴페인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아빠가 좀 더 많이 먹어야겠구나. 그나저나 토요일 낮의 킹크랩은 한 주를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 같은 느낌이다. 뭔가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간 아내와 선물을 주고받아 본 기억이 없구나.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그렇게 게 눈 감추듯 먹어대다가 뒤늦게서야 아무것도 메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인과 음식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데 말이야. 킹크랩과 샴페인 조합은 나에게 '쓰는 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도록 만들었다. 대상을 살펴보고 냉철하게 평가하려면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해야 하는데, 킹크랩과 샴페인을 번갈아 주입하다 보니 그 풍미에 휩쓸리고 견인되어 '먹는 자'로서의 정체성만 남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