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밭엔 배추가 가득하다.여름을 이겨낸 들녘엔 가을이 가득이다. 비탈밭엔 가을 배추가 고갱이를 안고 몸집을 불렸고, 어김없이 찾아 온 김장철에 골짜기는 벌써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푸르른 배추가 농부의 마음을 알아내고 벌써 몸을 불려 놓았기 때문이다.
박희종
여름이 서서히 저물 무렵 작은 텃밭에 김장배추를 심었다. 덩달아 무도 심어야 김장을 하고 깍두기라도 담을 수 있다. 간간이 내리는 여름비를 맞으며 노란 새싹은 대지를 밀어냈고, 어린 배추는 바람 따라 이파리를 나풀거렸다. 연초록 잎이 커지기도 전에 오지랖 넓은 암탉이 병아리를 끌고 텃밭으로 나섰다. 먹음직스러운 배춧잎을 놔둘 리 없었으니 인간은 기어이 울타리를 쳐야 맘이 놓였다. 그 시절 어머님이 계절을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가뭄이 오면 물을 줘야 했고, 장마철이면 물길을 내야만 했다. 기어이 계절이 바뀌어 늦가을이 되면 동네엔 한바탕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이웃집과 어울려 김장을 하고 아랫집 김장도 도와줘야 해서다. 텃밭에서 뽑은 배추를 갈라 커다란 다라에 절여 놓았다. 지난가을 장만해 두었던 간수 빠진 소금을 이용해야 김장맛이 좋다. 여기에 젓갈도 빠질 수 없으니 겨울양식인 김장 준비가 끝이 났다. 먹음직한 돼지 수육이 빠질 수 없으니 양지바른 곳에 온갖 식구들이 다 모여 잔치를 벌였다.
널따란 툇마루에 앉아 소주잔이 오가는 즐거움에 김장을 하는 듯했다. 그 때는 온 가족이 모인 즐거움 속에 김장이 마무리되면, 뒤꼍 큼직한 웅덩이엔 겨우내 먹을 김칫독을 묻었다. 깊숙이 묻은 김칫독에 두툼한 볏짚으로 마무리했다. 혹독한 추위를 막을 움막이 설치되고 간이 문을 만들어야 김장이 끝나는 것이었다. 겨우내 양식이었던 김장김치, 새봄에 맛보던 그 김장김치 맛을 다시 맛볼 순 없을까? 얼음이 숭숭 얼어붙은 김장김치의 맛은 추억 속에서만 그려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것들
원래는 농부들은 김장배추를 심어 가을을 준비했다. 기어이 알찬 배추로 길러내 소중한 목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 등록금에 하숙비를 줘야 하고, 큰 딸 결혼식도 치러내야 하지만 해마다 반복되던 배추농사는 늘 허전했다. 어쩌다 배추가 실하게 되면 중간상인들의 차지가 됐고, 지지부진한 배추 농사는 늘 가슴에 멍을 남겨주곤 했다. 세월이 변하면서 농부들의 환경도 변하고 있었다.
배추를 밭뙈기로 중간상인에게 넘기던 시절은 지나갔고, 온 동네가 합심하여 절임배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거대한 창고를 짓고, 온 밭을 뒤덮을 정도의 큰 비닐하우스에 절임배추 공장을 세웠다. 집집마다 배추를 수확하기가 바쁜 계절이 돌아와 골짜기에 새로운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에 김장배추를 팔며 절임배추를 주문받기 위한 처절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현장에서 직접 김치를 담아 팔아 내는 풍경이 새롭게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