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만성리에 위치한 형제묘
임재근
전남동부지역은 가릴 곳 없이 곳곳이 학살지였습니다. 강산이 일곱 번도 더 변한 지금은 학살지의 모습이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대부분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나마 가장 원형을 잘 유지 하는 곳이 여수 만성리 '형제묘'입니다. 안내문을 보면 학살의 과정이 언급돼 있습니다.
"1949년 1월 13일,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부역혐의자들 중 125명이 총살된 후 그 시신은 장작더미에 쌓여 불태워졌다."
토벌군은 어떻게 이런 잔인한 학살을 할 수 있었을까요?
75년 전 이곳에는 간도특설대 출신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만주에서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겠다는 목표로 일본 관동군 간도 특무기관장 오고에(小越信雄) 중좌의 주도로 창설됐습니다. 1939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습니다. 하사관과 사병 역시 전원 조선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항일 무장세력 토벌'이 목적이었지만, 수많은 민간인을 고문, 학살, 강간, 방화, 약탈하는 등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총살 후 화형을 할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이런 간도특설대 출신의 군인들이 여수 학살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군법회의의 처형 집행권을 호남지구계엄사령부에 일임했습니다.
호남지구계엄사령관이던 김백일, 여수지구계엄사령관 송석하는 만주 간도특설대 출신이었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반군토벌사령부 정보참모 백선엽, 제15연대 연대장 최남근도 간도특설대 출신이었습니다. 간도특설대 출신의 군인들이 해방 전 만주에서 벌였던 만행을 해방 후 여수에서 그대로 반복했던 것입니다.
신분을 바꾸고 계속된 학살
여수지구계엄사령관 송석하는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1묘역 93번 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1915년 4월 6일 충청남도 대덕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 되던 해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37년 5기로 졸업해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이후 간도특설대가 창설돼 복무했습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모두 108차례 공격했습니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습니다. 송석하는 1941년 3월 중위로 진급해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상위(대위)였습니다. 1943년 9월 훈5위 경운장(景雲章)을 받을 정도로 일제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일제 패망 후 송석하는 다른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꾸었습니다. 만주국군 상위 송석하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들어가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2년도 되지 않은 1948년 8월 육군 소령으로 특진해 제3연대 부연대장이 됐고,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1개 대대를 이끌고 진압 작전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제4연대 박기병 소령에 이어 여수지구계엄사령관이 됐고, 반군색출과 학살을 주도해나갔습니다. 여순학살 과정에서 그는 백인엽에 이어 제12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가, 1949년 8월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을 지냈습니다.
한국전쟁에 20사단장으로 참전했던 그는 이후 1955년 육군소장으로 진급했습니다. 1956년 11월 3관구사령관에 전보됐고, 그 뒤 육군본부 기획통제실장을 거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재직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조선경비사관학교 동기생이었던 박정희 육군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송석하는 그 직후인 1961년 7월 국방연구원장을 지내다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습니다. 전역 후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 1963년부터 1967년까지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 1969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장, 1972년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 등을 지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