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기의 사진(왼쪽, 20대)과 손응교의 사진(오른쪽, 98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김찬기는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1933년, 세 살 연하의 손응교와 결혼했습니다. 손응교는 김창숙의 울산 동지 손후익의 둘째 딸이었습니다. 며느리 손응교가 시아버지를 처음 맞이한 곳은 대전형무소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 면회를 간 것이 폐백을 올리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심산 김창숙이 감옥 문을 나온 것은 1934년 10월이 되어서였습니다. 김창숙은 고문과 고된 옥살이로 두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형 집행이 정지되어 출옥했습니다.
김창숙은 감옥 문을 나왔지만, 김찬기가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김찬기의 두 번째 투옥은 결혼 이듬해에 벌어졌습니다. 21살의 김찬기는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앞두고서 불온문서를 살포한 혐의로 1934년 11월 5일에 체포되는데, 다행히 사건은 크게 번지지 않고 한 달여 만인 12월 6일에 풀려났습니다. 김찬기는 1938년에 '왜관 사건'으로 세 번째 투옥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한 것은 3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김찬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43년에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밀파되었습니다. 막내아들 형기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19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뜬 장남 환기를 대신해 장남 역할을 해 왔던 차남 찬기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장남 역할을 막내 형기가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김찬기는 중경으로 떠나면서 아내 손응교에게 늦어도 3년 안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는데, 3년이 채 되지 않아 일제가 패망해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찬기는 해방 후 귀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5년 10월 10일에 중경에서 병사했습니다. 김찬기의 유해는 화장한 후 나무로 짠 작은 유골함에 담겨 고향으로 봉환되었습니다. 남편이 살아 돌아올 거라 기대했던 손응교는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목이 잠겨 5~6개월 동안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죽을 때까지 민주·통일운동에 나선 김창숙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심산 김창숙은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김창숙은 불의에 항거하며 철저한 선비 정신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는 일제가 친일로 오염시킨 유림계를 바로잡고 일제에 의해 폐교된 성균관을 부활시켜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을 설립해, 성균관장을 겸하는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분단이 가시화되자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7거두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헌신적으로 노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