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산으로 어머니들이 하얀 치마저고리 입고 아이를 업고 혹은 손을 잡고 끌려 올라갔던 오솔길
김영희
아산 부역혐의 학살사건이란
아산지역 부역자 혐의 처벌은 1950년 9월 26일과 27일 미군이 천안을 지나던 무렵, 각 읍∙면 치안을 맡았던 치안대(의용경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등)에 의해 시작되었고, 1950년 9월 29일 온양 경찰이 복귀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아산지역의 피학살자 수는 최소 8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 지역의 일부인 배방읍 중리 설화산의 경우, 1951년 1월 6일 온양경찰서와 향토방위대장이 공모하여 좌익 관련자와 가족, 부역(附逆) 혐의자(온양읍과 아산군 일대 부역자) 등을 금곡초등학교에 감금했다가, 흑암슈퍼(당시 금방앗간)에 2~3일간 감금한 후 저녁 무렵 설화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하고 시신을 폐광에 유기한 사건이다.
당시 설화산 피학살자는 200~300명으로 추정된다. 가족들의 행렬이 '장날 소 떼엮듯이' 새끼줄로 묶인 채 끌려간 후 1시간 정도 있으니까 총소리가 탕탕탕 다다다다 들렸고 학살은 저녁 늦게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과연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날을 되새기며 2018년 2월 20일(40일간) 진행된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옛 지명 성재산) 발굴 현장 상황을 알아보자.
타지역 피학살자는 보도연맹원이 많은 반면, 아산 지역은 부역혐의자가 많이 학살되었다. 부역 혐의란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당시 부역혐의자들은 적법한 조사나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학살되었으며, 그 가족들 역시 마을회의, 도민증 발급이라는 연락을 받고 소집되었다가 이유도 모른 채 살해되었다.
그렇다면 가족 중 어린아이들은 국가에 반하는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일에 동조했는지 묻고 싶다. 어떤 이유로 부모와 함께 왜 살해했는지.
필자는 설화산 발굴장에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경남 진주, 대전시, 충남 홍성군과 또 다른 학살의 배경과 학살 과정, 대상이 너무 달라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어느 지역의 학살 행위에 경중이 있겠냐만, 설화산 학살에 참여한 가해자들은 악마 그 자체였다.
유해발굴만 40일
그간 공동조사단의 유해 발굴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발굴단이 모두 자원봉사자이기도 하고, 발굴 경비가 시민사회단체 후원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화산은 유해 발굴을 40일간 실시했다. 아산유족회가 지속적으로 아산시에 유해발굴을 요청하면서 '한국전쟁민간인학살 추모에 관한 조례'를 제정, 예산 1억2천만 원을 지원해서다.
필자는 아산시가 참 고맙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진주시는 타 지역에 비해 학살지가 많은데도 발굴 비용에 대한 예산조차 편성하지 않고 있다. 주변 봉사자들이 '진주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물어올 때마다 진주시민으로서 부끄러워진다. 암튼 발굴 기간이 넉넉해 완전한 발굴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발굴 시작도 하기 전 큰 난관이 발생했다. 배방읍 중리마을 사람들이 발굴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피학살자들이 부역혐의자들이기에 당연히 죽어 마땅하고, 그들의 저주받는 뼈들이 중리마을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 아직도 어르신들의 사고 속에선 그들이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그런 생각을 해야만 살 수 있었기에 그랬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월이 60년이 흘렀는데 상황은 전혀 변하거나 바뀌지 않았다.
박선주 유해발굴단장과 김장호 전 아산유족회 회장, 아산시청 행정과 직원 등이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피학살자들의 원한도 풀어주고, 고이 모시면 동네도 좋아지고 서로가 좋은 일이라 설득하여 겨우 허락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