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닝턴의 기사 내용
대전골령골 벽보 사진 제공
필자는 짐작해본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작품이 신천학살이나 대전 골령골 학살의 배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피카소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딱히 날짜가 맞진 않지만,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한 게 1951년 1월 18일이다.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한국전쟁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프랑스 진보언론 <위마니테>나 프랑스 공산당 측에서 정보를 받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술평론가 알프레드는 '한국에서의 학살'이 공산주의의 선전에 사용될 목적으로 그려졌고 반미 선전의 작품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림으로 한국전쟁의 민간인 학살을 세상에 고발하고 미국과 촉각을 세우며 대응한 그 용기와 대담성은 존경하고도 남을 만하지 않을까.
남과 북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건 처리 방법
북한은 신천학살이 우익치안대와 미군의 합작품임에도 인민재판에서 우익치안대 4명만 처벌하고 사건의 전모를 접는다. 한편 신천학살의 모든 책임이 미군에 있음을 주장한다.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우익치안대의 활동을 광범하게 알리는 것 자체가 정권 입장에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고 한다. 또 신천박물관은 전시와 사상과 교양의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신천학살 피학살자의 죽음을 국가 차원에서 애도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집단정신을 고양하는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반면 남한은 보도연맹원, 부역혐의, 정치범, 독립운동가 등 학살 당한 자의 유족을 보호하기는 커녕 가해자 은폐에 급급해, 73년이 넘도록 '가해자 없는 피해자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피학살자 가족은 연좌제로 평생을 감시받고 멸시당하면서 살았다. 이제라도 제노사이드에 동조하고 명령에 충성했던 자들이 남은 인생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진실을 밝혀 주길 바란다.
세계사적인 제노사이드나 한국의 제노사이드, 그 뒤편에는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가 관련되어 있다.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피카소의 세 반전 작품 중 두 작품(게르니카, 시체구덩이)은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시민의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는 걸 그림으로 고발하고 경종을 울리게 했다. 피카소의 사상과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나머지 한 작품인 한국에서의 학살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의 작은 나라, 한반도에서 일어난 국지전 성격의 한국전쟁을 피카소가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냉전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비롯된 비극임을 작품에 잔뜩 담아 주었다.
3대 반전 작품의 특징을 살펴보면 게르니카와 시체구덩이는 흑백 유화 작품으로 완성하였지만, 한국에서의 학살은 초록과 황색의 색채로 표현해 '평화와 희망'을 더욱 강조했다.
미국이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준 전시장 거래처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고 신변을 위협 받으면서까지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 피카소의 예술가로서 대담성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끝으로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다. 인권 문제를 대하는 자세도 인권 대국의 대열에 우뚝 설 수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다운 국격이 갖춰질 것이다.
12화 아산 설화산 편이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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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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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가담 후 이민... 북한에 남겨진 가족의 예상 밖 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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