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 강성헌
김영희
아버지의 죽음, 남겨진 가족의 삶
아들 강성헌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큰고모(강달순)는 시집을 가고 작은고모(강종순)는 도립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주변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지내던 작은고모는 착하고 성실한 오빠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해 버린 남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회의로 인민군으로 자원입대했다. 인민군에서 간호사로 종사하던 작은 고모는 인민군이 퇴각할 때 월북하여 소식이 두절 되었다.
시집 간 큰고모는 어느 날, '삶이 괴로워 더는 살 수가 없다'는 유서 한 장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 이후 남강에서 경찰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남겨진 가족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학살지를 찾았다. 어머니가 본 장면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구덩이에 시체가 가득했고, 땅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오뉴월이라 시신 썩는 악취도 진동하였다. 어머니는 그 많은 시신 더미에서 아버지를 찾고 또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중앙시장에서 노점상으로 겨우 생활하였다. 강성헌이 7살이 됐을 때, 어머니는 주위 권유로 자식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주겠다는 임아무개와 재혼한다.
의부는 결혼 전 약속대로 누나와 강성헌에게 잘해주었다. 두 오누이는 마산 진동에 있는 태봉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집에서 10리(4km)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두 오누이는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을 보고 경치가 아름다운 산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강성헌씨는 그 시절이 유년기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어느 날, 의붓동생(임○○)이 밤새 경기 하다가 병원도 못 가 보고 그만 죽고 말았다. 풍수 일로 자주 집을 비운 의부가 집에 돌아와 제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자식이 죽은 것은 우리 아버지 귀신 때문'이라며 누나와 강성헌을 외가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네 새끼, 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키워야 한다'며 다시 어머니께 돌려보냈고, 그 길로 의부는 누나를 남의 집 가정부로, 강성헌은 보육원으로 보내버렸다. 홀로 삶을 책임지던 강성헌은 26살이 되어서야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항상 "세월 잘못 만나서 그렇지,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강성헌은 어머니의 말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다.
강성헌씨는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당할까 호적에도 혼자 올려져 있었다. 강씨 문중에서도 친인척들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아버지 이름을 호적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는 현재 부산에서 외식업을 한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공한 것을 보니 필자의 마음이 기쁘다.
7회 관지리(화령골)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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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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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선택·월북·보육원... 한 가족에게 남겨진 불우한 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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