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 선생 각하 통지서
김영희
2022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고 정태인 선생에 대한 결정문 각하 통보가 왔다.
각하 통보 이유를 알아보니, 정태인 선생의 가족은 진화위 1기 때 신청하여 결정통지서를 받았다. 통지서를 받을 시 민사소송을 해야 하는데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낮고 형의 죽음을 배상받는 것 자체가 싫어 고민 끝에 민사소송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1기 때 결정문 받고 3년 이내 소송 하지 않으면 2기 때 재신청을 해도 각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고 진화위는 설명했다. '손해배상청구권 3년 공소 시효 소멸'을 적용한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범죄)'는 장기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는 3년 공소 시효를 적용했다.
결국 고 정태인 선생의 유족은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73년을 기다려서도 끝내 원하는 배·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냇동생인 정상중 어르신은 "배상 안 받아도 된다"며 안타까워하는 필자를 위로했다.
남은 가족의 상흔
정상중 어르신은 통화할 때마다 "그 상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어요"라고 말한 후 한숨을 쉰다. 긴 이야기지만 독자 여러분과 함께 들어보고자 한다.
"큰형이 학살되고 둘째 형은 큰형의 좌익활동 기록으로 경찰한테 온갖 수모를 겪었어요. 한국이 싫다며 미국으로 떠나서 오지 않아요. 누나 둘은 시집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큰누나를 경찰한테 시집 보내면 고통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좌익활동을 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에 경찰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혼했어요.
저희는 진양호 수몰 지역 마을 이주 문제 당시 전답과 양조장등을 보상받아 부산으로 갔어요. 본가는 언덕 높은 곳에 있어 팔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가 부산과 진주를 오가며 살았어요.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죠. 진주 보상금을 큰누나가 친구한테 빌려줬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온 가족이 무일푼 신세로 더욱 고난의 세월을 보냈어요.
외가도 쑥대밭이 되어버렸어요. 외삼촌(김석대)이 육군 대위로 근무했는데 맡고 있던 중대원들을 데리고 월북하다가 잡혀서 다리에 총을 맞고 형무소에서 25년간 감옥살이를 했어요. 노후에는 순댓국 장사를 해 돈을 잘 벌었어요.
또 다른 외삼촌(김석종)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시 경찰서장 자리도 거절할 정도로 똑똑하셨나 봐요. 속으로 '왜 서장 자리를 거절하지'라고 생각했어요. 국회의원 출마까지 할 정도의 능력과 실력이 뛰어난 분이었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외가에서 도움받은 기억은 없어요.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오면서 거의 연락이 두절됐어요. 2000년 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석종 삼촌의 아들(외사촌형)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포항제철 이사로 근무하며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래서 외사촌 형한테 '형 아버지가 우리 형과 누나들 세뇌해 집안 망하게 했던 거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이제 지난 일이니 다 잊고 살자'고 하데요. 어찌나 속상한지 그게 잊자고 잊히는 겁니까? 끔찍한 수난과 상흔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어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단돈 3만 원 가지고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어요. 모진 고생하면서 안 해본 일 없고 끼니 굶은 건 애사 일이었어요. 1982년 결혼했지만 자식들 핫도그 하나 사줄 형편이 안 될 정도로 힘들었어요. 모진 고통과 상흔을 이겨내고 83세인 지금, 광장동에서 동네 유지가 돼 잘살고 있어요."
정상중 어르신이 필자와 헤어질 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묻자 '작은 성의'라고 한다. 정중히 거절한 후 헤어진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 후 어르신으로부터 주소를 알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왜 그러냐'고 여쭤보니 '미역 조금 보내드리면 안 되겠냐'고 하신다. 성의를 무시하는 듯싶어 주소를 드렸더니 미역과 멸치를 보내주셨다.
정 많고 따뜻한 어르신을 뵙고 나니 그의 형인 고 정태인 선생도 어질고 넉넉하고 멋있는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25세 나이에 꿈 한 번 펼쳐보지 못한 채 학살된 게 얼마나 억울했으면, 52년 만에 본인이 누구인지 명백하게 밝히는 도장과 젓가락, 구두칼을 품고 우리에게 왔나 싶었다.
뼈에는 좌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