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한글학회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
1942년 10월 1일에 시작된 '조선어학회 사건'은 위와 같은 어느 조선 여학생의 일기장에 적힌 한 줄의 문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기장의 주인은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희.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일제는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에 즈음하여 조선어 교육 폐지에 착수했습니다. 이후 학교에서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고,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서사'를 발표한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국어(일본어)'를 썼다고 야단친 교사가 있었다니... 경찰은 박영희를 비롯해 일기장에 자주 등장하는 동급생들까지 홍원경찰서로 연행해 일어 사용을 못하게 한 자들의 이름을 대라며 이들을 취조하고 고문했습니다. 극심한 고문 끝에 이들은 교사 정태진, 김학준, 최복녀의 이름을 대고 말았습니다.
경찰은 현직에 있어 도주의 우려가 적은 김학준과 최복녀의 신문은 뒤로 미루고, 학교를 그만둔 정태진에게 먼저 출두명령서를 발부했습니다. 정태진은 11년간 근무했던 영생고등여학교를 1940년 5월에 떠나 서울로 가서 조선어학회 사전편찬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1942년 9월 5일에 홍원경찰서로 연행되어온 정태진은 20여 일 간 계속된 고문으로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단체라고 허위자백하고 말았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비화되어 10월 1일에 이극로·이중화·장지영·최현배·한징·이윤재·이희승·정인승·권승욱·이석린 등 11명의 조선어학회 간부의 검거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43년 3월까지 이우식, 김법린 등 전국 각지에 있던 조선어학회 회원 및 사전편찬 후원회원들까지 총 33명에게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동안 작업해놓은 원고들도 압수당해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