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학년도 수능 대비 7월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시행된 11일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지금 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요지경이다. 에너지 음료를 물처럼 들이키며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수능에 다 걸기 한 절박한 아이들부터 이미 졸업한 듯 교실을 놀이터 삼는 아이들까지 두루 섞여 하루를 보내고 있다. 수시 원서 접수가 마무리되고 대학별 전형이 시작된 터라, 아이들 각자 자신의 '갈 길'을 알고 있어서다.
운 좋게 합격한다 해도 수능 최저 등급을 맞춰야 하는 상위권 아이들에게 지금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야 하는 시기다. 형식적인 2학기 교내 시험도 모두 끝나 모든 일상을 수능일인 11월 16일에 맞추고 있다. 반면에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않은' 하위권 아이들에겐 방학이 따로 없다. 지방의 사립대의 경우, 정원 채우기도 힘들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수시 원서 접수 현황을 보노라면, 깜짝 놀라게 된다. 내신 1점대 최상위권의 '의치한약' 선호 현상이 확연하다.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더니 이젠 단 한 명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굳어져 버렸다. '의치한약'만큼은 수도권과 지방, 국립과 사립이라는 학벌 구조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수시 모집에 지원할 수 있는 여섯 곳을 죄다 '의치한약'으로 채운 경우도 드물지 않다.
마땅히 쓸 만한 곳이 없어서 명문대 이공대에 지원했다는 한 아이는 어차피 합격해도 '반수'를 하게 될 것 같다고 선선히 말했다. 애초 등록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어차피 재수, 삼수를 각오한 마당에 다니지도 않을 대학에 낼 등록금이 아깝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님도, 친한 선배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힘들어도 '전문직'"이라고 강조했단다.
"유능한 기술자, 과학자보다 무능한 의사가 백 배 낫대요."
최상위권 한 아이가 수시 원서를 준비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과학자가 되겠다고 카이스트에 진학했다가 다시 수능을 준비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박사 학위를 받고도 의사가 되기 위해 다시 대입에 뛰어든 늦깎이 수험생도 있다. 이태 전 서울대 공대에 진학한 한 아이는 의치대 진학에 실패했다며 열패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서울대 인문대에 재학 중인 아이가 군대까지 다녀와 미적분, 물리, 화학 등의 이과 과목을 공부해 '의치한약'으로 진로를 급격히 바꿨다는 소식도 들었다. 여느 때 같으면 뉴스에 등장할 법한 특이한 사례지만, 요즘엔 익숙하다 못해 식상한 이야기다. 그들은 아무리 'SKY' 학벌이라고 해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했다면, 졸업해봐야 백수 신세를 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일렬로 서열화했던 학벌 구조가 다층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를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빗대어 설명하는 아이도 있다. '의치한약'은 브라만, 'SKY'를 비롯한 서울 명문대는 크샤트리아, '인-서울' 대학과 지방 거점 국립대는 바이샤, 나머지 지방의 수많은 사립대는 수드라로 규정했다. 브라만은 감히 범접할 수 없고, 서울 명문대까지가 지배층의 범주라는 거다.
바이샤와 수드라, 곧 평민과 천민을 가르는 그의 기준도 당황스럽다. 수드라에 속하는 대학들은 딱히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곳이니, 천대받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다. 나아가 수능 점수에 따라 신분과 처우가 정해지는 걸 공정하다고 본다. 학벌 구조를 카스트 제도로 이해할 만큼 능력주의가 요즘 아이들의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최상위권이 죄다 '의치한약'에 쏠리다 보니, 미래 과학자를 양성하는 특수목적대학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카이스트나 광주과학기술원(GIST), 한국에너지공과대학(KENTECH), 포스텍(POSTECH) 등을 지원하는 경우가 해마다 줄고 있다. 이젠 서울대 공대가 '의치대 사관학교'로 불릴 지경이고, 사교육 시장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치대반'까지 등장했다.
맹목적인 '의치한약' 열풍에 최상위권 아이들 각자의 재능과 적성은 끼어들 틈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의사나 약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오직 한 가지, 내신 성적과 수능 점수뿐이다. 이젠 초등학생들조차 재수, 삼수, 아니 구수, 십수를 하더라도, 일단 합격만 하면 평생 사회적 대우와 경제적 풍요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서, 대입을 마치 도박처럼 여기고 있다.
진정한 교육 개혁의 열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