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전국연합학력평가(9월 모평)가 치러진 6일 오전 강원 춘천시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
연합뉴스
중간고사 전날 자습 시간, 다그치며 수학 공부하랬더니 채 10분도 못 버틴 준형(가명)이의 책상 위엔 역사책이 펼쳐져 있다. 그것도 교과서가 아닌, 제목조차 낯선 두툼한 역사 교양서다. '수포자(수학 포기자)'인 그에게 역사책을 읽는 건 공부이기보다는 취미이자 휴식이다.
하지만 수학 수업은 그에게 어쩔 수 없이 '멍 때리는' 시간이다. 귀 쫑긋 세워 봐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고, 그렇다고 책상에 엎드려 잘 수도 없다며 하소연한다. 차마 열강하시는 선생님께 누 끼칠 순 없지 않으냐고 반문할 만큼 나름 예의 바른 친구다.
수학 수업보다 시험 때가 더 좋단다. 선생님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엎드려 잠잘 수 있는 시간이어서다. 시작종이 울린 뒤 3분이면 족하다. 반, 번호, 이름을 적고, 문항 수를 확인한 뒤 번호 하나를 골라 한 줄로 그으면 그의 시험은 끝난다. 물론, 서술형은 비워둔 채로다.
지금 인문계고등학교에서 널리고 널린 게 그와 같은 '수포자'다. 수학 수업 중인 교실을 들여다보면, 그 수가 확연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수능을 코앞에 둔 고3의 경우엔 둘 중 한 명이, 갓 입학한 고1조차 세 명 중 한 명이 '수포자'라는 이야기가 교사들 사이에 공공연하다.
교육 당국은 학교에 기초학력 부진 학생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종용하지만, 눈에 띄는 효과는 없다. 본디 기초학력이란 성취 기준에 도달하는 걸 의미하지만,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에겐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성취 기준이 아니라 내신 등급이다.
등급을 산출해 한 줄 세우는 상대평가 방식에서 기초학력 보장 프로그램은 되레 하위권 아이들을 낙인찍는 부작용만 양산한다. 어차피 태반이 '찍고 자는데', 그들 사이에 순위를 매겨 부진아를 가려내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한다. 대놓고 '운이 없어' 부진아가 됐다고 투덜댄다.
선다형 문항의 정답을 배분한 교사가 부진아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시험이 다섯 개 중 정답이 더 많은 번호로 찍은 아이가 '승자'가 되는 게임이라는 거다. 찍어서 점수가 더 높게 나온다면, 굳이 어렵사리 공부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반문할 지경이 됐다.
"선생님.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수학 공부에 힘을 쏟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역사 공부를 하는 것이 제 개인에게도, 또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요?"
"당장 대학엘 갈 수 없으니 문제"라고 눙쳤지만, 하마터면 '네 말이 옳다'며 맞장구를 칠 뻔했다. 역사 공부를 놀이처럼 여기는 그의 머릿속에 당최 이해하지 못하는 수학 공식을 욱여넣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다. 대입의 당락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과목이지만, 적어도 그에겐 가성비 제로의 허망한 고역일 뿐이다.
'수학'이라는 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