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최진동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251호)
김선재
최진동 장군은 1883년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매우 어렵게 성장했는데요. 중국인 대지주의 머슴을 살다 양자가 된 사건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지주가 가진 큰 재산을 물려받고 이후 통역관으로 일하며 재산을 쌓았는데요. 봉오동 일대 황무지를 사들여 점차 대지주가 됩니다. 이후 동생인 최운산, 최치흥과 함께 독립운동의 후원자 겸 주역으로 나서게 되는데요.
봉오동에 학교를 세워 애국 사상을 널리 전파하는데 앞장서고 이상설 선생이 서전의숙을 개설할 때, 강우규 지사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할 때도 최진동 장군이 후원했습니다.
마침내 1919년 겨울 독립군인 군무도독부를 설립했습니다. 초기에 병력 200여 명을 4개 중대로 편성합니다. 또 1920년에는 북간도에 있는 여러 독립군과 단체를 통일하기 위해 대한신민단, 북로군정서, 광복단, 국민회, 의군부 등 대표와 만나 협의를 진행했습니다. 최진동 장군은 그 과정에 모든 일을 항상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인 홍범도 장군과 상호 협조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이후 최진동 장군의 군무도독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규면의 대한신민회, 구춘선의 대한국민회 이범윤의 의군부 등 10여 개 부대 총 3500여 명 독립군이 하나의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 재편했습니다. 그때 외교부장을 맡은 이가 최진동입니다.
하지만 곧 우리 독립운동사 최대 참변인 자유시 참변이 터졌습니다. 최진동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함께 러시아 공산당과 협력하는 노선을 따릅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홍범도 장군과 함께 참가해 레닌에게 권총을 선물받기도 합니다.
이후 최진동 장군은 러시아에서 북간도로 돌아와 독립운동 통합을 도모하고, 국내 진공을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최진동 장군이 이끄는 부대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를 단장으로 하는 대한도독부의 독립군의 수가 4119명이요, 장총 4059정, 기관총 27정, 대포가 4문등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940년 일본은 최진동 장군에게 비행장 확장을 위한 땅 기부를 강요했는데, 이를 거부했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최진동 장군은 1941년 고문 후유증으로 눈을 감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독립운동 대소사를 상의했던 최진동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같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3묘역 251호는 홍범도 장군 묘역과 지근거리입니다. 대전현충원에서 재회한 두 분이 죽어서도 긴밀히 상의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독립군에 식량제공한 마하도, 무장시킨 박승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