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나서 서훈을 받은 이상룡 일가의 가계도
임재근
이상룡 선생 집안에서는 선생을 포함해 동생, 아들, 조카 등 여러 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이상룡 선생의 첫째 동생 이상동은 1919년 3월 13일 안동읍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월 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둘째 동생 이봉희는 1908년 2월 이상룡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협동학교 설립에 참여하며 구국교육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이상룡 선생과 만주로 망명한 이봉희는 1914년 유하현에 소재한 신흥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썼습니다.
1919년 서로군정서 창설요원으로 활동했고, 이듬해인 1920년에 광복단 서간도지역 외교원으로 임명되어 중국 정부 등과 교섭해 농토개척에 대한 허가를 얻어냈습니다. 화룡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에 나서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 흑룡강성에서 사망했습니다.
당숙 이승화는 1908년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상룡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가 1915년에는 국내에 들어와 충청남도·경상도·경기도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던 중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한 뒤에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조카 이광민(동생 이봉희의 아들)은 1915년 백부 이상룡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신흥학교를 수료한 후 동화학교 교원으로 청소년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1924년 7월 소집된 전만통일회 주비회발기회에 군정치 대표로 활동했고, 1926년 1월에는 정의부 중앙위원 겸 법무위원장으로 취임해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삼부통합을 위해 김동삼, 오동진 등과 함께 정의부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조카 이형국(동생 이상동의 아들)도 1911년 백부 이상룡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1913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신흥사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형국은 1924년 신간회 안동지회를 조직해 교육부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또 다른 조카 이운형(이형국의 동생)도 1918년 만주에서 김동삼·이청천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습니다. 그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 결성에 힘썼으며, 서로군정서의 비밀특파원이 되어 국내에 출입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선생의 아들 이준형은 1911년 1월 5일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해 경학사 설립을 도왔습니다. 1919년 11월에는 서로군정서의 독판이던 부친의 활동을 보좌하며 활동했고, 1925년 1월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길림성 화전현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준형은 1932년 부친의 장례를 지낸 뒤에 신주를 집으로 모시며 제사를 드리기 위해 귀향한 후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국운을 비관한 이준형은 1942년 9월 2일 자결해 생을 마쳤습니다.
손자 이병화(이준형의 아들)는 1916년 조부 이상룡을 따라 부친 이준형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1921년 무장투쟁단체인 통의부가 조직되자 가입해 활동했고, 그해 의주군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순사를 살해한 후 귀대하였는데, 한참 지난 1934년 5월에 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