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매마을 골목에서 본 고리핵발전소 돔
김우창
더욱이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신고리핵발전소 5·6호기 건설 공사를 승인받기 전인 2015년부터 주민들이 반대하는데도 수중 취·배수구조물 축조 공사를 불법적으로 강행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경작 중인 작물을 수확하라며 결국 이주를 촉구하기까지 했다. 장영식은 두 번이나 잔인하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그들을 '슬픈 유민(流民)'이라 불렀다.
어느 순간 우리는 '고향'이라는 개념, 감각이 거의 없잖아요. 한 70대 이상 넘어가야, 고향이나 마을에 대한 감각이 있을 텐데. 저도 60대지만, 사실 고향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어요. 고령의 주민들은 고향을 떠난다는 것에 대한 상처가 굉장히 큰 거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핵발전소로 인해 뿌리 뽑힌 거니까. 그만큼 1세대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남다른 거죠.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서 겨우 정착한 마을에서 살 만하니까 또 쫓겨난 말도 안 되는 폭력의 역사를 겪어오신 거죠.
'공공성'과 '개발'의 이름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핵발전소를 짓기 위해 누군가의 삶과 평생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러한 국가폭력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만들어진 '전원개발촉진법'에 의해 쉽게 정당화되곤 했다. 전력 생산과 공급의 중요성을 내세워 송전탑과 핵발전소를 세웠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삶과 권리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그저 개개인에게 전가되었다.
뒤늦게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지만, 갈등이나 문제의 핵심을 해결하기보다는 '보상'과 '지원금'으로 갈등을 무마하거나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 등으로 갈등은 불행히도 주민들 사이로 다시 옮아가기 일쑤였다.
이처럼, 전기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사람이 살던 곳에 핵발전소가 세워지고 가동되는 동안, 최인접 마을에서 살던 주민들은 피해와 영향에 알아서 대응하거나 적응하며 살아야 했다. 집단이주를 한 곳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아 입던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거나 힘들게 거친 논과 밭을 새롭게 경작해야 했고,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로부터 어업권은커녕 마을 구성원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삶처럼 말이다.
즉, 핵발전소와 함께 30~40년을 살아간 주민들이 체득하고 경험했던 것은 그 누구도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피해와 영향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개인화에 적응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설적이고도 무책임한 역사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주민들의 선택 하나가 있었다. "핵발전소를 반대하기 때문에 유치한 사람들", 장영식은 이를 '슬픈 역설'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왜?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나 역시 한 주민들이 내건 요구에 어안이 벙벙했었다. 한수원 노동조합만큼이나 더 강렬하게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을 반대했던 사람들. 그들은 누구이며, 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지지했던 것일까?
2017년 당시 장영식의 시선도 그들에게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는 2017년 10월 12일 "왜 우리가 핵발전소를 찬성해야만 했을까요?"라는 제목의 포토에세이를 작성했다. 장영식은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주민 중 일부는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건설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신고리 핵발전소 건설이 고시될 때부터 가장 강렬하게 반대했던 주민들이 왜 찬성하고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그토록 반대했던 신고리 핵발전소 3, 4호기가 이 지역 어디에서도 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집 마당에서도 동네 골목길에서도 바다 위 삶의 현장 어디에서도 핵발전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핵발전소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핵발전소가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년 전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두려웠던 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고리 핵발전소 3호기 건설 때 온갖 소음과 폭발음 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 온갖 짝퉁 부품을 보도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 간에는 신고리 핵발전소 3호기의 문제점과 그 위험성에 대해 귓속말로 주고받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장영식의 기사 "왜 우리가 핵발전소를 찬성해야만 했을까요?" 중 일부
장영식은 "그들은 누구보다 핵발전소를 반대했고 오랜 기간 싸웠으나, 결국 국가가 밀어붙이는 핵발전소를 막아내지 못했다. 때로는 함께 싸웠던 활동가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이웃 주민들에겐 날이 선 말들을 해야 했다"라고 말하며, "신고리 핵발전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새 핵발전소를 자신들의 마을에 유치해야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주민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참담한 현실을 기록했고 이해하고자 했다. 핵발전소가 싫어서 핵발전소를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누가, '찬핵론자', '핵마피아'라고 돌을 던지며 '돈 때문에 핵발전소를 유치'한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꼭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근데, 그걸 현장에도 와보지 않은 전문가들은 핵발전소를 찬성하는 그들을 '돈에 환장한 사람들'로 분석하더라고요. 활동가들조차도 그렇고요. 근데 저는 오히려 되묻고 싶어요.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때 "우리가 편하게 쓰는 전기 때문에 희생당한 지역과 고통받아 온 사람들에게, 우리는 얼마만큼 성찰했고 고백했는가"를. 우리는 우리의 안락한 삶과 그들의 희생과 피해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에서 새로운 탈핵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논리와 지식만 가득한 글과 말이 아니라, 주민들의 삶과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장 너머의 삶의 복잡함
장영식이 '슬픈 역설'이라 부르던, 한편으론 잘 이해되지 않는 주민들의 선택을 나 역시 찬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안에서만 생각하고 바라보았으며 그들을 비판하고 나무랐었다. 현장에 와 본 적이 없으니 핵발전소를 유치하는 주민들은 '그저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었고, '핵발전소라는 위험과 편익을 기꺼이 교환'하려는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 현장인 그곳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떻게든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억척같이 살아내야 하는 일상과 삶의 공간이었던 것을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좋고 나쁨, 찬핵과 탈핵의 윤리와 도덕적 잣대로는 설명할 수도 경계지을 수도 없는 현장 너머의 삶의 복잡함이, 그들 빼앗긴 삶과 역사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