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2003년 10월,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제주 4.3사건에 대해 정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
제주4.3 아카이브
국가는 외면했지만 문화는 기억했다
국가는 오래 진실을 외면했지만 문화는 비극을 기억하려 했다. 문학계에선 현기영과 이산하, 김석범과 문충성이, 영화계에선 김경률과 오멸이 끝나지 않은 비극을 조명했다. 어느덧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한강 역시 그중 하나였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비극을 다룬다. 전작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증언한 작가는 이번엔 끝나지 않은 제주의 비극을 소재로 삼았다. 마치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비극의 증인이 되겠다는 듯이, 문학으로써 그 모든 폭력을 기록하고 저항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소설엔 두 친구가 나온다. 새로운 소설을 준비하는 소설가 경하는 어느 날 문자 한 통을 받는다. '경하야' 하고 이름 석 자만 적힌 문자는 친구 인선으로부터 온 것이다. 전엔 다큐멘터리를 찍었으나 지금은 제주에서 목공을 하며 사는 인선이었다. 인선은 경하에게 제가 입원한 병원 이름을 일러주었고, 도착한 그녀에게 부탁 하나를 하였다. 제주에 있는 집으로 가서 기르던 새 '아마'에게 물을 주라는 것이다. 새는 물을 마시지 못하면 얼마 살지 못하므로 날을 넘기지 말고 바삐 가달라는 부탁이다. 경하는 인선의 새를 한 번 본 것이 고작이지만 차마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날 바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꺼지지 않은 생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날씨는 험상궂었다. 폭설이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간신히 버스를 잡아탔지만 산 중턱 외딴 곳에 있는 인선의 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흐린 기억을 간신히 부여잡고 경하는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한발 한발 내딛기 어려운 제주, 움푹 파인 땅을 잘못 디딘 경하의 머리에선 핏물까지 흐른다. 그러나 경하는 멈출 수 없다. 눈밭을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던 경하의 눈에 드디어 한줄기 빛이 보인다. 미처 끄지 못한 인선의 목공방 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