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희 총기난사사건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이방인 세계에서 고립된 소년’이란 제목을 달아 사고의 원인을 근원적인 것에서 찾았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2007년 발생한 조승희씨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을 예로 들면, 우리 보수언론은 외국 언론과 완전히 상반되는 보도 태도를 보였다. <조선일보>는 조씨 누나의 명문대 학력과 이력까지 공개하며 조씨와 비교했고, <중앙일보>는 "자신만의 내부적 악마 키웠다"면서 개인 문제로 몰고갔다. 이에 견주어 미국에서는 보수신문으로 불리는 <워싱턴포스트>도 '이방인 세계에서 고립된 소년'이라며 미국 사회의 문제로 부각했다.
당시 이태식 주미대사는 "조승희에게 죽은 사람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자"고 말한 반면, 버지니아공대는 조씨를 포함해 33개 추모석을 설치했다. 학생들은 조승희 추모석에 '너를 미워하지 않아, 오히려 가슴이 미어진다' '네가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슬펐단다' 같은 연민과 반성의 글을 남겼다.
추모는 그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태원 희생자만은 예외다. 집에서 지내는 제사에도 지방을 써 붙이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닷새 연속 들른 서울광장 합동분향소에는 영정조차 없었다. 이태원 참사 명단은 쉬쉬하면서 24일 '서해 수호의 날' 행사에서 윤 대통령은 55용사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강제동원 제3자 변제와 독도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제대로 이름도 불리지 못한 채 잊히고 있다. 그게 안타까운 나머지 유가족들은 27일부터 '10.29 진실버스'를 타고 '사회적 재난'의 진상을 알리려 나섰다. 오는 4월 3일에는 제주시청 앞에서 열리는 '4.3민중항쟁 75주년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다. 4.3 제주와 10.29 이태원은 동병상련의 시간과 장소다.
혐오에 기반한 정치는 파시즘의 전조
지금 제주도에는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내용이 적힌 현수막들이 나부끼고 있다. 이름에 주로 '자유'가 들어간 정당과 단체가 내건 것들이다. 최고 득표로 당선된 여당 최고위원과 정부 산하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등도 4.3과 5.18 혐오 발언을 수시로 했다. 집권정당과 정부 당국자가 혐오 표현을 공공연히 하거나 방조하는 일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던 현상이다.
이들은 제주의 남로당 관련자가 4.3사건 촉발에 기여한 적은 있지만 북한이나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물론 4.3사건 과잉 진압의 참혹함은 애써 외면한다. 4.3사건을 <순이삼촌> 등 소설로 맨 먼저 고발했다가 고초를 치른 현기영 작가는 <해룡 이야기>에서 이렇게 썼다.
"통틀어 이백도 안 되는 무장폭도를 진압한다고 온 섬을 불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든 격이었다. 그래서 이백을 훨씬 넘어 삼만이 죽었다."
예나 지금이나 혐오에 기반한 정치는 파시즘의 전조다. 핏빛 동백꽃은 지고 노란 유채꽃이 비극의 현장을 뒤덮고 있는 이 계절에 제주를 자기 정치에 이용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동백꽃이 진다 하여 꽃다운 이름마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