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 기념탑.
Widerstand
베트남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에 퍼지고 있던 공산주의의 물결을 차단하겠다는 명목 하에, 전범도 군부도 별다른 처벌과 제재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1954년 태국은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를 창설했고, 미국과 완전한 동맹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피분송크람의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이어졌고, 한때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자유 태국 운동 관련 인사들도 탄압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국제사회는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57년,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를 통해 해군 제독 출신 사릿 탄나랏이 총리직에 오릅니다. 1963년 사릿이 사망하자 이번에는 육군 장군 출신 타놈 킷티카촌이 정권을 잡았죠. 베트남전이 벌어지며 태국은 더욱 충실한 미국의 우방국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의회가 해산되고 헌법이 정지되는 등 독재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습니다.
결국 정권에 대한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1973년 6월 학생신문에서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대학생 9명이 퇴학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10월까지 시위는 점차 거세졌습니다. 민정 이양을 주장하던 50만 명의 시민들을 향해 군부는 헬기 사격까지 벌이기 시작합니다.
군부의 강력한 진압에 대피하기 시작한 시민들에게 국왕은 왕궁의 문을 열어주었고, 국왕은 정권의 퇴진을 명령합니다. 이렇게 민정 이양이 시작되었고, 카오산 로드 인근의 10월 14일 기념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사건은 1932년 쿠데타 이후 국왕이 정치에 개입한 최초의 사례였고, 이렇게 세워진 민주정에게 좋은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적인 문제와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공산화로 우파 세력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우파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의 갈등도 격화됩니다. 결국 군정이 무너지고 3년 만인 1976년 10월, 탐마삿 대학을 점거한 대학생들을 군부가 진압하며 최소 40명에서 최대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는 '10월 6일 학살'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날 밤, 군부는 쿠데타를 벌이고 민정은 다시 한 번 붕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