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악 포안 전경.
Widerstand
하지만 수르야바르만 2세가 사망해 묻혔다고 해서, 그 뒤에 앙코르 와트가 그대로 남겨진 것은 아닙니다. 부조나 건물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추가되었죠. 12세기 말 크메르 제국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며 힌두교 도상 대신 불교 도상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다시 힌두교로 돌아온 뒤에는 불교 도상의 파괴와 힌두교 도상으로의 복원도 이루어졌습니다. 부조는 계속 파괴되고 또 복원되며 변화했죠.
크메르 제국이 시엠립을 떠나 프놈펜으로 옮긴 이후에도 앙코르 와트는 방치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7세기까지도 캄보디아의 왕실은 앙코르 와트를 멀리서나마 관리하려고 끊임없이 애썼습니다.
앙코르 와트 뿐만이 아닙니다. 앙코르 유적군의 모든 건물들이 그렇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건물과 조각은 만들어지고, 무너지고, 복원되고, 또 파괴되었습니다. 여러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정비하고 만들어낸 작품이었죠. 건물 하나하나가 농축된 1천 년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유적군 전체가 몇 세기 동안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화한 것입니다.
그 역사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19세기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고고학자들이 앙코르 유적군을 발굴,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도 앙코르 유적 곳곳에서는 복원 프로젝트에 참가한 다양한 국가의 국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 일본, 한국, 독일, 인도까지 아주 다양한 국가를요.
어떤 의미에서 앙코르 유적군은 이 땅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 국적도 시대도 막론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유적인 셈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인의 유산이지요. 실제로, 앙코르 유적군의 발굴과 복원 경험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