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동 차이나타운길 끝이 지하철 7호선 대림역. 낯선 간자체 간판이 차이나타운임을 보이고 있다.
이영천
큰길에서 작은 길로 꺾어 돌자, 몇 걸음 만에 확연한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즐비한 간자체 간판이 차이나타운임을 웅변한다. 공기와 냄새가 다르다. 낯선 언어만큼이나 음식도 낯설다. 중국 음식 특유의 향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들 풍토와 문화, 전통이 대림동 길거리에서 짙은 향으로 조리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차이나타운 한가운데임을 실감한다.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길가 좁은 골목에 들어서니 구인 알림판 몇이 서 있다. 일할 장소와 일당, 비자 요건이 적혀 있다. 기간은 며칠에서 길면 한 달 남짓이다. 이 공간 속 조선족 동포와 화교가 살아내는 삶의 단면이, 알림판 작은 글씨로 늘어서 있었다.
차이나타운
쿨리(Coolie)였다. 반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중국인으로, 이들이 임오군란 때 인천에 주둔한 자국 군대 뒷바라지 목적으로 한반도에 처음 발 딛는다. 2년 후 4천여 평 조계지를 인천에 설치한 게 한반도 차이나타운 모태다. 화교는 특유의 장사수완과 근면함으로 일제강점기 막강한 경제력을 구축한다.
이들이 곤궁에 처한 건 정작 해방 이후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무역이 끊기고, 이주 억제로 인구가 정체한다. 한국전쟁 중 이승만은 정책으로 화교를 차별한다. '창고봉쇄령'으로 화교 무역상이 타격을 입는다. 중국 음식점에 차별적 세율을 적용하고, 음식값 인상을 통제했다.
박정희는 가혹했다.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은 전적으로 화교를 겨냥한 법이었다. 화교는 정부 승인을 얻어야 토지 소유가 가능했다. 1970년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에 따라 1가구 1주택에 1점포만 허용되고 주택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받는다. 논밭이나 임야 취득은 불가능했으며 취득한 토지와 건물은 임대할 수도 없었다.
외국인 거류 제도에 의해서도 고통받는다. 영주권 제도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화교는 '외국인 출입국관리법'을 따라야 했다. 거주자와 비거주자로 분류되고, 거주자는 2년마다 비자를 받아야 했다.